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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혁 ==
대종교에 따르면, [[중광 (대종교)|중광]]조 [[나철]]이 1905년 서대문역 근처에서 백전(佰佺) 도인으로부터 대종교의 경전이 된〈삼일신고(三一神誥)〉와〈신사기(神事記)〉를 전해 받고, 1908년 도쿄에서 두일백(杜一白) 도인으로부터〈[[단군교포명서]]〉를 받았으며, 이를 계기로 대종교를 일으켰다고 한다.<ref>[http://
시교(始敎)한 지 1년 만인 1910년, 대종교로 교명을 개칭하는 한편, 같은해 [[만주]] [[북간도]]에 지사를 설치하였다가, 1914년에는 대종교 본사를 이곳으로 옮겨 포교 영역을 국내와 만주 일대로 확대시켰다.<ref name="글로벌_1"/> 정훈모(鄭薰模)는 [[1910년]] [[7월 30일]]에 대종교로 명칭을 변경하자 ‘단군교’의 이름을 고수하며 분파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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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 중광 60년사에 따르면 나철은 이 사건 때문에 정부 전복 혐의로 무안군 지도(智島)에 유배되기도 했는데, 1909년 정월 15일 자시(子時: 밤 11시~새벽 1시) 서울 북부 재동(齋洞) 취운정(翠雲亭) 아래에서 60여 명의 동지들과 단군교를 새롭게 열면서 이날을 중광절(重光節)로 삼았다. 중광이란 기존에 있던 것을 새롭게 중흥한다는 의미였다. 망국이 눈앞에 있었기 때문에 위기를 느낀 사람들이 단군교에 속속 입교했지만 서울 북부지사교(北部支司敎) 정훈모가 친일로 돌아서고 일제의 탄압이 가해지자 나철은 [[1910년]] [[8월]] 교명을 대종교로 바꾸었다.<ref>[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24785 홍범도 대한독립군] 망국 10년 만에 국내 진공작전 포문, 중앙SUNDAY(2012.02.05) 기사 참조</ref>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나철이 교명을 대종교로 바꾸고 만주로 교단을 이동하자 정훈모가 이에 반발하여 단군교라는 교명을 고수하며 교단을 분리·독립하였다. 이 단군교는 [[단군]]을 신봉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통치에 순응하는 등 단군교 교단의 수뇌부 중 일부에는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친일파]]가 있었다. <ref>단군교부흥경략(檀君敎復興經略), 1책 82장, 신연활자본, 김재웅(金在雄) 교열, 정진홍(鄭鎭洪) 편집(1937년) 참조</ref> [[나철]]이 교명을 바꿔 만주로 이동하게 된 계기는 정훈모를 중심으로 몇몇 친일분자들에 의한 교단 내분이었다.<ref>「한국종교사상사」, 대종교 창건사, 김홍철 저 연세대학교출판부(1998년, 145P ~148P 내용참조)</ref> [[1912년]]에 내분이 일어나 교단이 둘로 나뉘어졌으나 1915년 정훈모가 교단을 재정비하였으며, 1930년에는 시흥에 단군전(檀君殿)을 세우고 본부를 이전하였다. 이후 내분이 이어지고 일제가 소수 종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자 1936년에 폐교되고 신자들도 와해되었다.<ref>「한국종교사상사」, 대종교 창건사, 김홍철 저 연세대학교출판부(1998년, 119P ~139P 내용참조)</ref> <ref>[http://
== 경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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