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교: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잔글 네이트 사전 서비스 종료에 따라 접근 불가능해진 링크 대체
23번째 줄:
 
== 연혁 ==
대종교에 따르면, [[중광 (대종교)|중광]]조 [[나철]]이 1905년 서대문역 근처에서 백전(佰佺) 도인으로부터 대종교의 경전이 된〈삼일신고(三一神誥)〉와〈신사기(神事記)〉를 전해 받고, 1908년 도쿄에서 두일백(杜一白) 도인으로부터〈[[단군교포명서]]〉를 받았으며, 이를 계기로 대종교를 일으켰다고 한다.<ref>[http://100encykorea.empasaks.comac.kr/dicsearchContents/pentry.htmlIndex?s=K&i=283228&vcontents_id=42E0026769 '삼일신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f> 나철은 일본이 한국에 대한 간섭과 강박이 날로 심해지자 이를 항의하고자 4차에 걸쳐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하여 구국운동이 몇 사람의 정객만으로는 이룩될 수 없음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국가의 기틀을 튼튼히 하고 민족을 부흥시키는 원동력은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데 있다고 보고, 1909년 1월 15일 동지 오기호, [[이기 (1848년)|이기]], [[김윤식 (1835년)|김윤식]], [[유근]] 등 10명과 함께 서울 종로구 재동에서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단군교포명서〉를 공포함으로써 국조 단군을 숭앙하는 단군교를 창시하였다.<ref name="글로벌_1"/>
 
시교(始敎)한 지 1년 만인 1910년, 대종교로 교명을 개칭하는 한편, 같은해 [[만주]] [[북간도]]에 지사를 설치하였다가, 1914년에는 대종교 본사를 이곳으로 옮겨 포교 영역을 국내와 만주 일대로 확대시켰다.<ref name="글로벌_1"/> 정훈모(鄭薰模)는 [[1910년]] [[7월 30일]]에 대종교로 명칭을 변경하자 ‘단군교’의 이름을 고수하며 분파해 나갔다.
39번째 줄:
대종교 중광 60년사에 따르면 나철은 이 사건 때문에 정부 전복 혐의로 무안군 지도(智島)에 유배되기도 했는데, 1909년 정월 15일 자시(子時: 밤 11시~새벽 1시) 서울 북부 재동(齋洞) 취운정(翠雲亭) 아래에서 60여 명의 동지들과 단군교를 새롭게 열면서 이날을 중광절(重光節)로 삼았다. 중광이란 기존에 있던 것을 새롭게 중흥한다는 의미였다. 망국이 눈앞에 있었기 때문에 위기를 느낀 사람들이 단군교에 속속 입교했지만 서울 북부지사교(北部支司敎) 정훈모가 친일로 돌아서고 일제의 탄압이 가해지자 나철은 [[1910년]] [[8월]] 교명을 대종교로 바꾸었다.<ref>[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24785 홍범도 대한독립군] 망국 10년 만에 국내 진공작전 포문, 중앙SUNDAY(2012.02.05) 기사 참조</ref>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나철이 교명을 대종교로 바꾸고 만주로 교단을 이동하자 정훈모가 이에 반발하여 단군교라는 교명을 고수하며 교단을 분리·독립하였다. 이 단군교는 [[단군]]을 신봉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통치에 순응하는 등 단군교 교단의 수뇌부 중 일부에는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친일파]]가 있었다. <ref>단군교부흥경략(檀君敎復興經略), 1책 82장, 신연활자본, 김재웅(金在雄) 교열, 정진홍(鄭鎭洪) 편집(1937년) 참조</ref> [[나철]]이 교명을 바꿔 만주로 이동하게 된 계기는 정훈모를 중심으로 몇몇 친일분자들에 의한 교단 내분이었다.<ref>「한국종교사상사」, 대종교 창건사, 김홍철 저 연세대학교출판부(1998년, 145P ~148P 내용참조)</ref> [[1912년]]에 내분이 일어나 교단이 둘로 나뉘어졌으나 1915년 정훈모가 교단을 재정비하였으며, 1930년에는 시흥에 단군전(檀君殿)을 세우고 본부를 이전하였다. 이후 내분이 이어지고 일제가 소수 종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자 1936년에 폐교되고 신자들도 와해되었다.<ref>「한국종교사상사」, 대종교 창건사, 김홍철 저 연세대학교출판부(1998년, 119P ~139P 내용참조)</ref> <ref>[http://100encykorea.nateaks.comac.kr/dicsearchContents/pentry.htmlIndex?s=K&i=280800&vcontents_id=44E0013540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단군교] “[[1912년]] 이유형·서창보의 사리사욕 행위에 대한 시교사(施敎師)들의 비판과 교인들끼리의 주도권 쟁탈로 교단에 내분이 일어나자 정훈모는 [[1915년]]에 양분된 교단을 재정비하고 [[1930년]] 교당인 단군전(檀君殿)을 시흥에 세워 본부를 이전, 본부와 지부의 조직을 강화, 교전(敎典)을 간행하는 등 활발한 포교활동을 벌였지만 곧 자금문제로 신도들이 교주를 고발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일제의 무관심과 압력이 가해지자 시흥의 본부가 폐쇄되고, 정훈모가 사망하면서 각 지부는 독자적인 행동에 단군교는 와해로 소멸되었다.”</ref>
 
== 경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