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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고생을 하면서 음악과 더불어 살아간 그는 10년 후인 1759년 마침내 [[보헤미아]]의 칼 폰 모르친(Karl von Morzin) 백작의 궁정악장(宮廷樂長)에 취임하였다. 보헤미아에 부임한 하이든은 그곳에서 초기의 교향악과 관악합주인 [[디베르티멘토]]를 작곡하였다. 그러다가 백작의 집안 재정상태가 좋지 않아 악단이 해산되는 바람에 다시 실업자가 되어 빈으로 돌아왔고, 1760년 11월 가발업자의 딸 마리아 안나 켈러(Maria Anna Keller)와 결혼하였다. 하지만 그는 연상의 아내에게서 가정의 행복을 평생 느끼지 못한다. 1761년 5월 1일 하이든은 예술의 열렬한 옹호자인 헝가리의 귀족 파울 안톤 에스테르하지 후작 집안의 관현악단 부악장(副樂長)에 취임하였다. 당시 관현악단의 관리와 훈련이 그 주임무였으며, 이로써 관현악 작법도 현저히 진보했다.
 
1762년 파울 안톤 후작이 타계하자 형과 마찬가지로 열렬한 에술의 옹호자인 동생 [[니콜라우스 에스테르하지|니콜라우스]] 후작이 뒤를 잇는다.그의 후원아래 관현악단은 충실히 확대되고 악장으로 취임한 하이든은 1790년까지 거의 30년에 가까운 세월을 충실한 악장으로 근무하였다. 후작은 [[베르사유 궁전]]에 자극을 받아 새로운 에스테르하자(Eszterháza) 별궁을 세우고 함께 여름 동안에는 전속 음악가도 동행하였는데, 1772년 여름 후작의 체재가 길어지자 《[[고별 교향곡]]》을 작곡하게 되는 유명한 일화가 생겼다. 이러한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부지런하고 충실한 악장 하이든과 단원과의 사이는 매우 원만해서, 교향곡 외에도 단원을 독주자로 하는 협주곡과 실내악곡을 많이 썼다. 그 동안에 많은 [[교향곡]]·[[현악4중주곡]]·[[오페라]] 등을 작곡하였는데, 특히 교향곡과 현악 4중주곡 등 실내악·클라비어소나타 등 기악곡에서 [[고전 시대 음악]]의 규범이 되는 형식을 창조하고, 1781년에는 [[소나타 형식]]의 전형으로 간주되는 6곡으로 된 《프러시안4중주곡러시안 4중주곡》을 완성하였다. 이것은 모차르트에게도 영향을 준 작품이다. 그리고 1780년대에는 [[파리 시|파리]]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6곡의 《파리교향곡》을 비롯하여 《토스토교향곡》(2곡) 《도니교향곡》(3곡) 등 명작을 잇달아 작곡하였다. 1790년 9월 그가 오랜 세월을 모시던 [[니콜라우스 에스테르하지]] 후작이 사망하자 그는 명예 악장이라는 칭호를 받음과 함께 그 직을 물러나 빈에서 살았다.
 
이 무렵 독일의 바이올린 연주자로서 런던에서 오케스트라를 거느리고 성공을 거둔 J.D.잘로몬의 권유로 그는 영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1791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런던에서 오케스트라 시즌에 출연하였는데, 그는 《잘로몬 교향곡》(제1기, 6곡)을 작곡하여 크게 성공하고,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명예음악박사의 칭호를 받았다. 그런 성과에 크게 자극을 받은 하이든은 1794년에서 이듬해에 걸쳐 다시 영국을 방문, 《잘로몬교향곡》(제2기, 6곡)을 작곡하였다. 만년에 하이든은 다시 에스테르하지 집안의 악장으로 되돌아갔으며, 뛰어난 미사곡 6곡을 작곡하고 또 두 개의 오라토리오의 대작 《천지창조》와 《사계》를 작곡하였다.
=== 1760-1790(아이젠슈타트에서 에스테르하지) ===
[[파일:Fertőd - The Eszterházy Castle or Palace.jpg|thumb|230px|에스테르하지의 전경]]
1761년, 헝가리의 에스테르하지 후작 가문의 부악장으로 취임하자 초기의 교향곡군이 탄생되었다. 1761년의 표제가 붙은 3부작(제6번 <아침>, 제7번 <낮>, 제8번 <저녁>)으로 대표되는 초기의 [[교향곡]]에는 [[바로크 음악|바로크]]의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나 1770년경의 이른바 '[[슈투름 운트 드랑]]'시기에 이르자 급격히 표현력이 심화하여 [[클라비어]] [[소나타]], 현악4중주, 교향곡 등에 현저한 발전의 자취가 새겨진다. 종래의 클라비어 소나타는 디베르티멘토풍의 경쾌한 성격이었으나 하이든은 [[엠마누엘 바흐]]의 '[[감정과다양식]]'의 풍부한 표현력이나 클라비어 협주곡의 견고한 구성을 소나타에 이식하여 소나타를 교향적인 것으로 하였다. 현악4중주도 디베르티멘토풍의 성격을 배제, 4악장 구성을 원칙으로 하여 고전파의 현악4중주 구조와 정신이 확립되었다. 여기서는 [[푸가 형식]]이 악장에 채택되고 있다. 그리고 이 시기의 교향곡에도 새로운 양식에 대한 의욕을 볼 수 있으며 [[단조]]의 채용, 힘찬 리듬적 충동에 의한 표현의 심화가 꾀해지고 있다. 1781년은 하이든이 전적으로 새로운 특별한 방법으로 작곡하였다고 자칭한 <프러시아러시안 4중주곡>이 소나타 형식을 실내악의 분야에도 확립한 것으로 의의가 깊다. 1783-1784년의 교향곡(제76번-81번)에는 [[모차르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되는 특징이 보이나, 한편 모차르트도 1782년부터 1785년에 작곡한 6곡의 현악4중주곡을 하이든에게 바쳐 선배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다. 1780년대 후반에는 하이든의 명성이 전유럽에 퍼져 외국으로부터의 작곡 의뢰가 늘어났다. 그리고 1786년에는 파리의 관현악단 콘세르 드 라 로쥬 올람피크로부터의 교향곡 6곡(제82번-87번)의 작곡의뢰를 받았다.
 
=== 1790년 이후(빈과 런던, 다시 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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