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매케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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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맥케이는 리도 운하의 공사가 끝난 이후에도 바이타운에 머물었던 몇 안되는 기업주였다. 그는 리도 강과 오타와 강 사이에 교차한 지점에 있는 땅을 사서 마을을 창립하였다. 그 마을의 이름은 [[:en:New Edinburgh|뉴 에든버러]]리고 명명하였다. 그는 거기서 [[:en:Sawmill|제재소]]와 [[:en:Gristmill|제분소]]를 지었다. 뉴 에든버러은 그의 도움으로 많은 스크틀랜드계 주민이 그곳에서 정착하도록 격려하여서 번창한 산업 중심지로 바꿨다. 그는 [[스코틀랜드 교회]] 소속 [[성 안드레아 장로교 교회 (오타와)|성 안드레아 장로교 교회]]의 장로 겸 관재인으로 활약하였다. 또한 그는 [[퀸스 대학교 (캐나다)|퀸스 대학교]]의 창립이사였다.
 
토마스 맥케이는 부유한 사업가가 되었으며 [[1837년]]에 그는 마을 동쪽에 4.5km<sup>2</sup>의 땅을 구입하였다. 그 땅의 서쪽 지역에서 그는 1838년에 [[리도 홀]]이라는 대저택을 지었다. 오늘날 캐나다의 [[캐나다의 총독|총독]]의 관저로 쓰인다.<ref>{{서적 인용 |저자= Richard W. Pound |제목= Fitzhenry and Whiteside Book of Canadian Facts and Dates |연도= 2005 |출판사= Fitzhenry and Whiteside |언어= 영어}}</ref> 그는 그의 딸과 사위을 위해서 [[:en:Earnscliffe|언스클리프]]이라는 대저택을 지었다. 맥케이가 소유하였던 잔여 토지는 나중에 [[:en:Rockcliffe Park, Ontario|록클리프 파크]]라는 마을로 변하였다. 또한 그는 오타와 지역에서 최초의 철도였던 [[:en:Bytown and Prescott Railway|바이타운 앤드 프레스콧 철도]]를 제공하였다. 철도의 종착역은 뉴 에든버러의 맨 북쪽에 있는 [[서섹스 드라이브]]에 있었다.
 
== 주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