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상노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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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상노군'''(太上老君)은 [[노자]](老子)를 신격화한 것이다. [[장자]]와 함께 [[도가]]의 시조이다. 이 계보가 그대로 신선설을 주장한 신선가(神仙家)를 거쳐서 [[도교]]에 도입되어 도교의 교조로 숭앙받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실재는 의문이다. [[한 (왕조)한나라|한대]](漢代)에 와서는 성(姓)이 이(李)라고 말하기도 하고 [[주 (왕조)주나라|주]](周) 왕조의 역사를 기록하던 고관(高官)으로서 [[유교]]의 개조인 [[공자]]도 노자에게 예(禮)를 물었다고도 전하며, 끝에는 함곡관(函谷關)에서 관리의 청탁으로 《[[도덕경]]》을 남기고 서방으로 사라져 행방이 묘연해졌다고도 한다. 또 어머니의 태내(胎內)에서 81년이나 있다가 어머니의 좌액(左腋)에서 태어났는데 그때 벌써 머리털이 백발이었기 때문에 '노자(老子)'라 말하고 태어날 때에 오얏나무(李樹)를 가리켰기 때문에 이(李)라는 성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또 역대(曆代)마다 나타나서 황제(黃帝) 시대에는 황성자(黃成子), 요(堯)의 시대에는 무성자(務成子)가 되었다는 등 갖가지 전설이 더하여 차차로 신격화되었으며 마침내는 [[원시천존]]의 화신(化身)으로까지 되었다.
 
태상노군이 된 것은 [[6세기]] 경부터로 [[당 (왕조)당나라|당대]](唐代)에는 당 왕실의 성과 노자의 성이 같은 이(李)라는 점에서 당실(唐室)의 조상으로도 숭앙되었으며 절대적인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신천사도 기타 교단 도교 제파는 노자와의 사이에 어떠한 관계를 지어서 자파(自派)의 가르침에 권위를 부여하려 하였다. 그 때문에 이들 교단의 창시와 관련된 여러 신화에는 자주 태상노군이 등장하여 창시자들에게 그 정통성을 인가해 주는 부록이나 그 교단의 근본경전·비법을 주는 등, 주요한 역할을 다하고 있다. 또 민중 도교에서도 근본 성전인 <태산감응편(太山感應篇)>은 태상노군의 가르침이라고 말하고 있다.
 
== 참고 문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