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사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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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묘하게 중립적인 듯 보이나 일본과 나치의 군사적행위는 전세계적으로 침략으로 규정되어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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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2={{국기그림|일본}} [[일본제국]]
[[파일:War flag of the Imperial Japanese Army.svg|22x20px|border]] [[일본제국 육군]]
|지휘관1={{국기그림|중화민국}} [[장쉐량]] <br /> {{국기그림|중화민국}} [[마잔산]] <br /> {{국기그림|중화민국}} [[펑잔하이]]
|지휘관2=[[파일:War flag of the Imperial Japanese Army.svg|22x20px|border]] [[혼조 시게루]] <br /> [[파일:War flag of the Imperial Japanese Army.svg|22x20px|border]] [[미나미 지로]]
|병력1= 160,000명
|병력2= 30,000명 ~ 66,0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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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 ==
{{참고|만보산 사건}}
일본은 [[포츠머스 조약]](1905년)에 의해 만주의 [[창춘]]-[[뤼순]]간 철도의 이권을 획득하고 [[관동주]]를 조차(1905년)한 이후 만주는 일본의 자본투자·상품시장·중공업 원료 공급지로서 일본 이익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관동군]]은 일본이 건설한 남만주 철도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1905년부터 만주에 설치되어 주둔하고 있었다.<ref name="남경태"/> [[신해혁명]](1911년) 이후 만주에 보안부대와 신군이 편성되었다. 장쭤린의 봉계 군벌 군대(봉군(奉軍), [[봉천파]])는 1920년 직계 군벌과 연합하여 환계 군벌을 패퇴시키고, 만주에서의 세력을 산해관 안쪽까지 확장하였다.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1918) 이후, [[봉천파]]를 원조하며 중국 동북지방을 노렸다.
 
[[1927년]] [[장제스]]가 지휘하는 [[국민혁명군]]은 '북벌운동'을 개시하면서 점차 [[봉천파]]의 군벌 [[장쭤린]]을 압박해왔고 그는 이에 밀리기 시작했다. 이들이 조만간 베이징을 점령할 것이 분명해진 것이었다. <ref name="비즐리"/> 그러자 막후에서 그를 지원하던 [[일본 제국|일본 정부]]도 결국 장쭤린에게 베이징을 국민당에 넘겨주고 퇴각하도록 권고했다. 다나카는 중국 북부에서 만주로 철수하도록 장쭤린에게 압력을 가했다. <ref name="비즐리"/> 만주에서는 일본군이 그를 보호할 수 있었다. <ref name="비즐리"/>장쭤린은 마지못해 동의하였다. <ref name="비즐리"/>그렇지만 일부 관동군 참모들은 이 조치에 계속 불만이었고, 괴뢰 군벌이 제공하는 것 이상의 직접 지배권을 만주에 요구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ref name="비즐리"/> 그 중 한 사람이었던 [[고모토 다이사쿠]] 대좌는 일을 벌일 구실을 꾸미기로 결심하였다.<ref name="비즐리"/> 고모토는 장쭤린이 더이상 이용가치가 없다고 판단하여 장쭤린을 제거하기로 하고, 고모토의 직속 부하로 하여금 베이징에서 톈진으로 돌아오는 장쭤린의 남만주 철도기차를 폭파하여 그를 암살(1928년 6월 4일, 장쭤린 폭살사건)한다. 이 사건은 사실상 고모토가 의도했던 일본의 만주 개입을 유발하지는 못했다.<ref name="비즐리"/> 왜냐하면 고모토의 상관이나 도쿄의 내각이나 그러한 행동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ref name="비즐리"/> 실제 고모토는 간신히 군법 회의를 면했다.<ref name="비즐리"/>
 
[[장쭤린]]이 [[관동군]]의 계략으로 피살됨으로써, 관동군과 봉천파 간의 협조 관계는 종결되었다. 국민당 정부는 북경을 점령한 뒤 청일통상조약(1896년)을 폐기한다고 일본에 통고하였다. <ref name="이이화"/> 이는 국민당 정부가 국민의 여론을 등에 업고 본격적으로 배일공세를 취하기 위한 신호였다. <ref name="이이화"/> 일본에 반감을 가지게 된,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이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국민당 정부]]에 합류(1929년)하게 되자 만주에서도 일본상품을 배척하고 제국주의적 이권을 다시 회수하고자 하는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장쉐량 정권은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여순·대련의 조차지 및 [[남만주 철도]]의 회수, 영사재판권 철회, 일본에 의한 철도부설권 및 탄광개발권 확장에 대한 반대, 일본인·조선인에 대한 가옥임대료 및 소작료 인상 또는 계약갱신 거부 등을 주장했다.<ref name="역사비평"/> 이로 인해 일본인의 동북 지역 활동은 크게 위축되었다.<ref name="역사비평"/> 그리고 중국 국민정부에 의한 만주철도포위선 건설계획은 만주철도의 이권을 위협하게 되었다. 1920년대에는 만주에 투자된 외국 자본 중 70% 이상이 일본의 자본이었을 정도로 일본은 만주 경영에서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었다.<ref name="남경태"/> 그러나, 1929년 발생한 세계 경제[[대공황]](1929~39년)으로 성장일로에 있던 일본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고<ref name="남경태"/> [[남만주 철도]] 영업도 부진하게 되었다.
 
이러한 중국의 국권회복운동과 [[소련]]의 제1차 5개년계획의 진척 등의 상황으로 인해 일본은 만주 전체를 침략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일본 국내에서는 이것을 <만·몽의 위기>라고 선전하고, 침략을 정당화시키는 여론을 조성하였다. [[관동군]]을 중심으로 한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시데하라 외교(당시 일본 외무대신인 [[시데하라 기주로]]의 국제협조노선에 바탕한 경제외교)의 연약함을 강력히 비난하면서 무력에 의한 동북침략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ref name="역사비평"/>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만주를 아예 점령하는 것만이 일본의 유일한 활로라고 주장했다.<ref name="남경태"/> 이렇게 보면 만주 사변은 사실상 관동군의 독자적인 결정인 것만은 아니었다.<ref name="남경태"/> 이런 상황에서 [[나카무라 대위 사건]]과 [[1931년]] 7월의 [[만보산 사건]]이 터져 나왔다. 1931년 6월에 나카무라 (中村) 대위 사건([[:ja:中村大尉事件|中村大尉事件]])이 발생했다.<ref name="고바야시"/> 변장을 하고 중국 동북의 [[다싱안링 산맥|흥안령(興安嶺)]] 지방에서 스파이 여행 중이던 참모본부의 나카무라 신타로(中村震太郎) 대위가 중국군에게 붙잡혀서 동행하던 이스키 노부타로(井杉延太郎) 예비역 상사 등과 함께 사살된 것이다.<ref name="고바야시"/> 진상은 8월이 되어서야 일본 측이 발표했는데 일본인의 반중국의식을 자극했다. <ref name="고바야시"/> 한편, 1931년 7월 2일, [[지린 성]] 창춘 현(長春縣) 싼싱바오(三姓堡) 만보산 지역에서 일본의 술책으로 조선족 농민과 중국인 농민 사이에 수로(水路) 문제로 충돌 및 유혈사태가 일어났고, 이것이 일본의 술책으로 인한 것을 알게 된 중국에서는 배일 운동이 더욱 심화되었다. (→[[만보산 사건]])
 
== 발단 ==
{{참고|류탸오후 사건}}
1931년 관동군 사령관으로 [[혼조 시게루]] 중장이 임명되었다.<ref name="이이화"/> 그는 8월 20일 뤼순의 관동군 사령부에 도착했다.<ref name="이이화"/> 그는 [[우가키 가즈시게]]의 부하로 만주침략 공작의 선봉에 섰다.<ref name="이이화"/> 두 사람은 죽이 잘 맞았고, 조선을 병참기지로 만들어 만주로 진출하는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ref name="이이화"/> 혼조는 부임하자마자 봉천과 장춘 등지를 시찰하고 9월 18일에 돌아왔다.<ref name="이이화"/>
 
같은 날(9월 18일) [[일본 제국]]의 [[관동군]]이 [[중국]]의 [[만주]]를 침략하기 위해 자작극을 벌였다. 만주 침략을 위한 작전의 시나리오는 [[관동군]] 작전 주임참모인 [[이시하라 간지]], 관동군 고급 참모인 [[이타가키 세이시로]], 관동군 사령관인 [[혼조 시게루]] 등 단 세 명이 만들었다. <ref name="마쓰오카"/> 이들을 중심으로 <만몽영유계획>이 모의되었다. 침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관동군은 [[1931년]] [[9월 18일]] 밤 10시 30분경 류탸오후에서 [[만철]] 선로를 스스로 폭파하고 이를 중국의 [[장쉐량]] 지휘하의 [[중화민국 동북변방군|동북군]] 소행이라고 발표한 후 [[관동군]]은 만주 침략을 개시하였다. (→[[류탸오후 사건]])
 
[[관동군]]은 [[장쉐량]]의 군영인 북대영과 [[펑톈 성 (만주국)|펑톈 성]](奉天省)을 공격(19일 새벽)<ref name="강영수"/> {{Rp|370}}하였고 이튿날 펑톈시를 비롯하여 만주철도 근처의 주요 도시를 점령하였다. 관동군 입장에서는, [[대공황]]으로 구미열강들의 간섭이 어려운 사정을 이용하고 [[장쉐량]]이 베이징에, 또한 봉천 군벌의 주력이 장성선 이남에 집결하고 있어 잔류 수비대가 동삼성에 분산되었던 기회를 포착한 것이었다.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는데도 난징의 국민정부는 사건의 확대를 막기 위해 결코 저항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고지했다.<ref name="강영수"/> {{Rp|370}} 베이징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장쉐량은 [[장제스]]의 지시에 따라 그들에게 저항하지 않는 방침을 취했다.<ref name="아라이"/> 관동군은 동대영, 봉천비행장 등을 손에 넣고 며칠 안 가서 [[지린 성]]까지 수중에 넣었다.<ref name="강영수"/> {{Rp|370}} 이로써, 관동군은 만주 침략작전을 시작한지 5일 만에 랴오둥, 지린성의 대부분 지역을 장악하고, 이 지역 군벌들에 압력을 가해 두 성의 중국으로 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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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론 ==
전쟁에 반대하는 지식인의 소리가 없지 않았으나 도쿄 대학 교수 야나이하라 다다오([[:zh:矢內原忠雄|矢內原忠雄]]) 등 일부 비판자들의 책은 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부의 관할 하에 있는 라디오를 비롯해 신문 잡지가 정부의 엄중한 검열 하에 있었으므로 전쟁에 비판적인 언론이 공연히 대중 앞에 모습을 나타낼 수가 없었다. <ref> [[송건호]] 저, 《송건호전집 4 》한길사(2002) 15쪽 ISBN 89-356-5504-X </ref>
 
조선의 독립운동가 겸 사상가 [[윤치호]]는 만주사변을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치밀하게 준비한 쿠데타라고 규정했다.<ref name="josak 39">윤치호, 《윤치호일기 1916~1943:한 지식인의 내면세계를 통해 본 식민지 시기》 (역사비평사, 2001) 39페이지</ref>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본의 대륙진출을 위한 성스러운 전쟁이라 홍보하자 [[윤치호]]는 이는 일본 군부의 성과 올리기에 불과하다며 반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