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레오 10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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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 10세의 치세 중에 [[마르틴 루터]]로 인하여 [[종교분열]]이 촉발하여 가톨릭교회에 한 차례 큰 분열이 일어났다.
 
1517년 10월 31일 [[모든 성인의성인 축일대축일]] 전날, 독일 [[아우구스티노회]] 소속 수사신부 마르틴 루터는 [[대사령]] 반포 선전위원으로 위촉된 자들이 직권을 남용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와 관련해서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였다. 몇몇 신학생들이 이러한 루터의 주장에 동조하여 95개조 반박문을 라틴어에서 독일어로 번역한 인쇄기를 통해 그것들을 유럽 전역에 널리 퍼뜨렸다. 루터의 반박문은 2주 만에 독일 전역으로 퍼져 나갔으며, 2달 후에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레오 10세는 당시 사태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으며, 1518년 2월 아우구스티노회의 총대리에게 수사들의 입단속을 지시하였다.
 
1517년 5월 30일 루터는 자신의 95개조 반박문에 대한 설명문을 레오 10세에게 제출하였다. 8월 7일 루터에게 로마 법정에 출두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회의 일정이 미리 계획되었지만, 나중에 소환이 취소되었다. 대신에 루터는 1518년 10월 [[교황특사]]인 [[가예타노 추기경]]을 만나러 아우크스부르크로 갔다. 그러나 가예타노 추기경의 논박으로도, 11월 9일 레오 10세가 교서를 통해 교황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대사령을 선포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고 설명했음에도 루터는 자신의 주장을 끝내 철회하지 않았다. 한동안 지지부진한 교섭만 이어졌고, 그러는 동안 독일 전역에 이와 같은 논쟁이 대중들 사이에 파고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