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르비니아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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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코르비니아노는 프랑크 영토인 [[물랭]] 근처 [[샤트르]]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발데키소'''(Waldegiso)였다. 그의 본명은 아버지의 이름을 따른 것이었는데, 아버지가 죽은 뒤에는 어머니의 이름인 코르비니아나(Corbiniana)<ref>[http://www.helmut-zenz.de/hzkorbin.htm Helmut Zenz: Heiliger Korbinian im Internet]를 참조하라. (2007-01-06 확인), 코르비니아노의 어머니 이름은 ‘코르비니아나’이다. ([[German language|German독일어]] - ''Nach dem Tod seiner Mutter '''Corbiniana''' lebte er als Eremit bei der Kirche von Saint-Germain bei Châtres.'' [[한국어]] - ‘그의 모친 코르비니아나가 사망하자 샤트르에 있는 성 제르마노 성당의 은수자가 되었다.’)</ref>에서 따온 코르비니아노로 이름을 바꾸었다.<ref name="compass">{{cite news| last =Staley| first =Tony| title =From recluse to missionary| publisher =The Compass| date =2004-09-03| url =http://www.thecompassnews.org/compass/2004-09-03/saintoftheday.shtml| accessdate=2007-01-04}}</ref> 코르비니아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프라이징의 주교 알베소가 쓴 《Vita Corbiniani》 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다.
 
어머니마저 죽자 코르비니아노는 [[오를레앙]]에 있는 생제르맹 성당에 몸을 바쳐 14년 동안 [[은수자]]로 살았다. 얼마 후 그의 명성을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암자로 몰려와 제자를 청하였다. 그 탓에 마음이 산란해진 코르비니아노는 번잡함을 피해 떠나기로 결심하고 신속히 [[사도]] 가운데 한 사람인 [[성 베드로]]의 무덤이 있는 [[로마]]로 갔다. 로마에 있는 동안, 그의 재능을 알아본 [[교황 그레고리오 2세]]는 그에게 [[바이에른]]에 복음을 전할 것을 권고하였다. 그레고리오 2세는 서둘러 코르비니아노를 주교로 임명한 후에 프랑크 출신 [[바이에른 공|바이에른 공작]] 그리모알트에게 사절로 파견하였다.<ref name="patrick">{{cite web| last =Rabenstein| first =Katherine| title =Corbinian of Freising | work =Saint o' the Day (September 8)| url =http://web.archive.org/web/20061205012140/http://www.saintpatrickdc.org/ss/0908.htm| accessdate=2012-02-23 |archiveurl = http://www.saintpatrickdc.org/ss/0908.shtml |archivedate = 2006-12-05}}</ref> 코르비니아노는 [[724년]]에 바이에른에 도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ref>{{cite encyclopedia| title =Freising| encyclopedia =[[Encyclopædia Britannica]]| year =2007| url = http://www.britannica.com/eb/article-9035326/Freising| accessdate=2007-01-04}}</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