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사화: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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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훈구 재상으로서 [[조광조]] 등의 탄핵을 받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으며, 모두 세력을 잃고 불평을 품게 되었다. 특히 [[조광조]] 등이 [[정국공신]](靖國功臣)<ref>[[중종 반정]] 공신</ref> 가운데는 공신으로서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 많으니, 이들의 공신호를 박탈하자고 건의하여, 마침내 전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76명<ref>[[심정 (1471년)|심정]](沈貞)도 포함</ref>의 공신호를 박탈하자 이에 놀란 훈신(勳臣)들은 수단을 가리지 않고 모략·중상에 나섰으니, 이것이 [[조광조]] 일파의 젊은 선비들이 화를 당하게 된 직접적 원인의 하나였다.
 
그 위에 처음에는 중종도 [[조광조]] 등의 혁신적인 정치에정치를 호의를후원하였으나 가졌으나조광조의 그들의정치가 지나친혁신성을 잃고 도학적(道學的) 언행에언행만을 되풀이하자 점차 총애를 거두었다. 실록을 따르면 이미 기묘사화 일이년 전부터 이미 중종의 총애가 조광조로부터 떠나고 있었으며 조광조는 중종이라는 후원자가 구속도없자 느끼고점차 염증도정계에서 없지고립되고 않았다있었다.
 
== 과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