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리아 제2제국: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111번째 줄:
 
=== 멸망 ===
[[1371년]] 이반 알렉산더르의 사후 터르노보에서는 넷째 아들 [[이반 시슈만]]이, 비딘에서는 이반 스라치미르가 차르를 칭했다. 하지만 불가리아의 운명은 발칸 반도의 양대 강국인 오스만 제국과 세르비아의 동향에 맡겨져 있었다.<ref name="주석9">クランプトン『ブルガリアの歴史』、42頁</ref> 이 해 세르비아의 부카신과 오스만 제국이 [[마리차 강]]에서 충돌하였고, 세르비아군은 괴멸하고 부카신 왕은 전사하였다. 오스만 제국은 이반 시슈만에게 강화 조건 불이행을 이유로 남부 불가리아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였고, [[1375년]] 이반 시슈만은 오스만에 대한 신종과 공납을 조건으로 협약을 갱신하였고 이반 시슈만의 여동생 케라 타마라가 무라트 1세에게 시집 보내졌다. 또한 비딘의 이반 스라치미르와 도브루자 데스포트국 등 각지의 봉건 세력들도 오스만의 속국이 되었다. [[1378년]] 오스만 제국은 화약을 파기하고 불가리아를 공격하여 [[1382년]] 소피아가 함락당하였다. 세르비아의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는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크리스트교기독교 세계의 동맹 결성을 호소하였고, 이반 시슈만은 동맹에 합류하였다. 하지만 이반 스라치미르는 오스만 제국에 신종을 맹세하고 오스만 제국을 지원하였다.
 
[[1387년]] 라자르의 연합군은 플로크니크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반 시슈만과 도브루자는 오스만 제국의 보복 대상이 되었다. [[1388년]] 오스만 제국의 찬다를리 알리 파샤(Çandarlı Ali Pasha)가 3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불가리아를 침공하였고, 이반 시슈만은 무라트 1세를 직접 방문하여 신종 서약을 다시 보여 다시 강화를 맺을 수 있었다. [[1389년]] [[코소보 전투]]에서 세르비아군이 대패하였고, 오스만 제국은 불가리아에 대한 직할 통치를 더욱 강화시켜 나갔다.<ref name="주석9" /> 결국 [[1393년]] 오스만 제국은 다시 발칸 반도에 공세를 실시했고, 3달 간의 포위 끝에 터르노보가 함락되었다. 이반 시슈만은 니코폴로 도망쳐 다시 화약을 맺고 영토의 인정을 보존받아야 하였다.<ref>ディミトロフ、イスーソフ、ショポフ『ブルガリア 1』、113頁</ref> [[1395년]] 로비네 전투 이후 오스만 제국은 다시 니코폴을 공격하여 함락시켰고, 이반 시슈만은 투옥당했다. 이반 스라치미르의 비딘 데스포트국은 불가리아에서 유일하게 독립 세력이 되었지만 [[1396년]] 헝가리 왕 [[지기스문트]]가 니코폴리스 십자군을 일으키자 이반 스라치미르는 신종 맹세를 어기고 십자군에 참가하였으며<ref>森安、今井『ブルガリア 風土と歴史』、138頁</ref>, 결국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이 승리한 후 비딘도 오스만 제국에게 합병당하였다. 이반 스라치미르는 아나톨리아로 끌려갔고 중세 불가리아 제국은 소멸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