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트프리트 하인리히 추 파펜하임 백작: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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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통치권으로부터 자유로운 고대가문이 그들의 이름을 수여받은 유래가 된 [[바이에른]] 지방 알트뮐(Altmühl)에 있는 [[파펜하임]]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튀빙겐]]의 [[아돌프]]에서 교육을 받고 이후 기사도적인 모험을 추구하며 남부와 중부 유럽을 여행하는 도중 여러 언어를 익혔다. 여러 나라에 머물면서 그는 결국 그가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쳐 헌신하게될 기독교(로마 카톨릭에가톨릭교회)에 대한 믿음을 받아들였다(1614). 대전쟁의 발발에 이르러 파펜하임은 그가 이제까지 얻은 그의 정규적이고 외교적인 모든 직위를 버리고 로마 카톨릭의가톨릭교회의 영향하에 있는 [[폴란드]]의 직위를 얻기 위해 성심성의껏 노력했다.
 
그는 곧 폴란드의 부대 지휘관이 되었고 후위대로 남겨진 [[프라하]](Prague; [[1620년]] [[11월 8일]])근처의 [[백산 전투]]에서 놀라운 용기를 보여주었다. 다음해 그는 [[만스펠트]]와 서부 독일에서 격전을 벌였고, [[1622년]] 중장기병 연대의 사령관이 되었다. [[1623년]] 파펜하임의 주군의 동맹자이자 그의 믿음의 대표자인 에스파냐의 열렬한 친구로서 그는 이탈리아 전쟁에 군대를 일으켰고 [[롬바르디아]]와 [[그리손]]등에서 에스파냐군과 함께 군무에 종사하였다. 이때 파펜하임은 그를 앞에서 눈에 잘 띄게 한 [[가르다 호수]]에 있는 리바 초소에서의 길고 영웅적인 방어전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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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시금 라인 남부에 위치한 [[쾰른]]으로 급파되었다. 그의 부재로 대전쟁은 급박해졌고 파펜하임은 급박하게 소환되었다. 그는 그의 기병대와 함께 [[뤼첸 전투]]의 중반에 나티났다. 그의 분노에 찬 공격은 일순간은 성공적이었다. 마스턴 무어(Marston Moor)전투의 루퍼트가 [[크롬웰]]을 자신의 가장 뛰어난 라이벌로 생각했듯이 지금 파펜하임은 구스타프 아돌프를 그렇게 여겼다.
 
스웨덴왕이 죽은 거의 동시에 전장의 다른 지역에서 파펜하임 역시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그는 당일 혹은 그의 사체가 보존된 플라이센부르크(Pleissenburg)가 있는 [[라이프치히]]로 가는 도중의 아침에 사망했다.
 
 
== 유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