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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삼국시대]](기원전 1세기~기원후 668년)<ref>《삼국사기》권 제1(신라 본기 제1) 中 "남해 차차웅이 즉위하니, 이는 혁거세의 '''적자'''(嫡子)이었다. (중략) 어머니는 '''알영부인'''이요, '''비'''(妃)는 '''운제부인'''이니, (중략)"</ref>, 통일신라시대(668년~698년)<ref>《삼국사기》권 제8(신라 본기 제8) 中 "신문왕이 즉위하니, 휘는 정명, 문무대왕의 장자다. 어머니는 '''자의왕후'''요, '''비'''(妃)는 김씨, 소판 흠돌의 딸이다. 왕이 '''태자 때에 비'''로 맞아들였는데, (중략)"</ref>, 남북국시대(698년~926년)<ref>《삼국사기》권 제9(신라 본기 제9) 中 "혜공왕이 즉위하니, 휘는 건운이고, 경덕왕의 '''적자'''(嫡子)다. 어머니는 김씨, '''만월 부인'''이니 서불감 의충의 딸이다. 왕의 즉위시의 나이 8세였으므로 '''태후'''(太后: 만월 부인)가 섭정하였다."</ref>에는 제왕(帝王)의 적배를 비(妃)라 하거나 후(后)라 하거나 부인(夫人)이라 하였는데 정확한 기준이 알려지지 않으며 적첩(嫡妾)의 구분도 애매하다.
# 중국 [[위 명제]](205년~239년) 때에 이르러 비(妃)가 황제의 후궁의 작위로도 쓰여지게 되었으며 [[진 무제]](236년 ~ 290년) 역시 9빈(1후 3부인 아래)의 으뜸에 숙비(淑妃)를 추가하고, [[남북조시대|남북조]](420~589)에서 이를 계승·답습함으로써 이후 비(妃)를 황제의 후궁의 작위로 겸용하는 것이 정착됐다. [[수 양제]](569년~618년) 때 이후로 비(妃)가 황후 아래의 1등 후궁으로 정착돼, 비(妃)가 후궁의 통칭으로 인지되기도 한다. 【참고: [[후궁 (중국)]]】
# [[고려시대]]에는 제왕의 적배를 왕후(王后)로 삼고 후궁을 부인(夫人)으로 삼다가 8대 임금인 [[고려 현종|현종]] 때부터 비(妃)를 제왕의 측실의 작위로 썼다.<ref>《증보문헌비고》</ref><ref>《高麗史》 卷七十七 志 卷第三十一 - 百官 二(내직: 내명부와 외명부) 中 "國初未有定制, 后妃而下, 以某院·某宮夫人爲號, 顯宗時, 有尙宮·尙寢·尙食·尙針之職, 又有貴妃·淑妃等號, 靖宗以後, 或稱院主·院妃, 或稱宮主, 文宗定官制, 貴妃·淑妃·德妃·賢妃並正一品.【外命婦, 公主·大長公主正一品, 國大夫人正三品, 郡大夫人·郡君正四品, 縣君正六品.】 忠宣王改宮主爲翁主. 忠惠以後, 後宮女職, 尊卑無等, 私婢官妓, 亦封翁主·宅主."</ref> 고려의 왕후(王后)와 [[왕태후]](王太后)는 중국 황실이나 조선과는 정의와 개념이 다른 독특한 것으로, 선왕의 왕후가 모두 [[왕태후]]로 봉숭되는 것은 아니었으며 왕의 생모 혹은 국공을 세운 왕후를 왕태후로 봉증(封贈)<ref group="註">봉(封)은 살아있는 사람에게, 증(贈)은 죽은 사람에게 작위를 주는 것이다.</ref>하여 다른 왕후들보다 한 단계 격을 높인 개별적 작위로 썼다.<ref>《高麗史》 卷二十一 世家 卷第二十一 - 康宗 元年 5월 中 "五月 追尊王妣懿靖王后金氏爲光靖太后."</ref><ref>《高麗史》 卷二十八 世家 卷第二十八 - 忠烈王 卽位年 12월 4일 中 "丙午 追尊妣靜順王后, 爲順敬太后."</ref><ref>《高麗史》 卷八十八 列傳 卷第一 - 后妃 신정왕태후 황보씨</ref><ref>《高麗史》 卷八十八 列傳 卷第一 - 后妃 고종 후비 안혜태후 유씨 中 "비(妃) → 사후 안혜비(安惠妃) → 아들 원종 즉위년에 왕태후로 추존되어 안혜왕태후로 추시</ref><ref name="no">《高麗史》 卷八十九 列傳 卷第二 - 后妃 中 "群臣上號曰, 仁德恭明慈睿宣安王太后."</ref> 역대 고려 왕후의 최종 시호 및 묘비명이 청나라<ref group="註">명나라의 경우, 사후 추시된 작위로서의 [[황태후]]와 태황태후는 서후(庶后)를 상징하여 황후보다 격이 낮으며 시호의 숫자 역시 한 글자 줄여 적후와 서후의 위계를 뚜렷이 했다. 청나라에서는 적후적후와 서후 모두 황후로 추존하되 시호의 글자 수에 차별을 두었을 뿐인데추존했는데 [[함풍제]] 때 [[도광제]]의 후궁이었던 황귀태비 박이제길특씨([[효정성황후]])를 사후 황후로 추존한 것에 대해 논란이 일어나 명나라의 제도를 인용해 황태후로 강봉해 다시 추시했다가 [[동치제]] 때 다시 황후로 추존했다.</ref>나 조선처럼 [[황후]]나 왕후로 통일되어 있지 않고 [[왕태후]]와 왕후가 섞여있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ref>《高麗史》 卷八十八 列傳 卷第一 后妃</ref> [[원 간섭기]]에 이르러 고려의 임금들이 원의 부마가 됨에 고려의 임금으로서의 입장과 원의 부마(王)<ref group="註">원의 부마는 왕(王)으로 봉해진다. 왕의 적배의 작위는 비(妃)이나 부마인 왕의 적배는 본래의 작위를 쓴다. 이는 조선의 부마가 봉군(封君)될 지라도 그 아내인 공·옹주의 작위는 바뀌지 않는 것과 동일하다.</ref><ref>[http://www.guoxue123.com/shibu/0401/01xtd/062.htm 《續通典》권58] 中 "元制凡駙馬尙公主率封王爵其宗王之女皆稱公主."</ref><ref>[http://www.guoxue123.com/shibu/0101/00ysf/108.htm 《元史》卷108 表第三 - 諸王表]</ref>로서의 입장이 충돌하게 된다<ref group="註">이는 '갑(甲)이 을(乙)의 남편이 되어 귀해졌느냐, 을(乙)이 갑(甲)의 아내가 되어 귀해졌느냐' 라는 것으로, 주(主)가 정해지는 문제이다.</ref>. 이에 고려 임금 중 처음으로 원의 공주를 적배로 맞이한 [[충렬왕]]은 처음엔 안평공주([[원 세조|세조]] 쿠빌라이의 딸)를 고려의 후(后)가 아닌 본래의 작위를 쓰게 하다가 그녀의 사후에 인명왕후로 추시했으며<ref>《高麗史》 卷八十九 列傳 卷第二 - 后妃 中 "九月, 葬高陵, 諡莊穆仁明王后"</ref> 그들의 아들 [[충선왕]]은 즉위 후 다시 모친을 인명태후로 추존했다.<ref>《高麗史》 卷三十三 世家 卷第三十三 - 忠宣王 卽位年 8월 14일 中 "追尊安平公主, 爲仁明太后."</ref> 그러나 원에서 그녀를 다시 추봉해 황고 [[제국대장공주]]의 시호를 내림에 고려에서 추시한 시호를 모두 고쳐야 했고, 이후부터 고려에선 후(后)를 쓰는 것을 포기하고 원의 공주로서 고려의 국모가 된 여인은 원의 작위인 공주를 쓰게 된다. 이는 단지 종전의 후비 제도에서 후(后)가 공주로 교체되고 제한이 없던 정원수가 한 명으로 수정된 것으로, 후궁은 본래의 제도대로 비(妃)<ref>《高麗史》 卷三十七 世家 卷第三十七 - 충정왕 총서 中 "忠定王諱㫝, 蒙古諱迷思監朶兒只, 忠惠王庶子, 母曰禧妃尹氏." (註: 희비 윤씨 소생 충정왕을 서자로 규정함.)</ref><ref>《高麗史》 卷八十九 列傳 卷第二 中 "(공민)八年, 宰相白公主曰, “王卽位九年, 未有太子, 願選良家女充後宮.” 公主許之. 乃納李齊賢女爲妃" (註: 공민왕이 즉위한 지 9년이 됐지만 아직 태자가 없어서 양가 출신의 여인들을 후궁으로 뽑기를 청했고 노국공주의 허가 아래 (먼저) 이제현의 딸(=[[혜비 이씨]])이 비로 뽑힘.)</ref><ref>《高麗史》 卷一百三十四 列傳 卷第四十七 - 우왕 8년 3월 中 "時毅妃寵傾後宮." (註: 당시 의비 노씨가 우왕이 가장 총애하는 후궁이라 꼽음.)</ref> 등을 썼으며, 후궁 출신 임금의 생모는 대비(大妃·太妃)로 삼았다. [[원 간섭기]]가 마친 후인 공민왕 14년, [[노국공주]](魯國公主)가 사망하자 대신들이 지어 올린 시호는 인덕공명자예선안왕태후로<ref name="no"></ref>, 우왕 즉위 후에는 인덕태후라 불렸다.<ref>《高麗史》 卷一百三十三 列傳 卷第四十六 - 禑王 卽位年 11월 中 "移安仁德太后眞于光巖寺."</ref> 공민왕 21년에는 [[충숙왕]]의 후궁이자 [[충혜왕]]과 [[공민왕]]의 생모인 [[공원왕후|왕대비 홍씨]]가 왕태후(太后) 격존됐고<ref>《高麗史》 卷八十九 列傳 卷第二 - 后妃 충숙왕 후비 명덕태후 홍씨 中 "二十一年正月, 王上尊號, 赦二罪以下. 冊曰, “王化之本, 莫先於孝, 人子之職, 宜顯其親. 况聖善之有恩, 盍封崇之以禮?. 恭惟, 王大妃, 夙傳家業, 克著母儀. 貞靜本乎天資, 柔順形於日用. 配先考, 專治于內, 警戒無違, 保小子, 式至于今, 劬勞罔極. 年垂八秩, 位冠東闈. 以言其德, 則宗社之所由安, 以言其功, 則臣民之所共賴. 持蠡抱管, 雖未足以形容, 檢玉泥金, 庶小伸於愛敬. 考本朝之舊典, 遵歷代之通規, 謹率百官, 奉金寶玉冊, 上尊號曰‘崇敬王太后.’ 茂對鴻名, 誕膺鉅慶, 躋于萬壽, 祚我三韓.” 改文睿府爲崇敬."</ref>, 우왕 즉위년에는 공민왕 때 우왕의 생모로 선포된 궁인 한씨가 순정왕후로 추존됐다.<ref>《高麗史》 卷一百三十三 列傳 卷第四十六 - 禑王 2年 윤9월 27일 中 "戊申 葬順靜王后韓氏于懿陵. 時明經及第韓略言, “我韓氏宗人也, 初韓氏卒, 我與韓氏族故僧能祐, 火其屍收骨, 厝于奉恩寺松林.”"</ref> 우왕은 적후를 세우지 않았으며, 숭명정책을 내세웠던 [[이성계]]의 섭정 시대인 창왕과 공양왕 땐 비(妃: 王妃·王太妃<ref group="註">공민왕의 후궁이었던 정비(定妃) 안씨가 공양왕 때 왕태비(王太妃·王大妃)로 존숭되었는데 이는 그녀의 친정이 [[이성계]]의 측에 서서 [[우왕]]을 폐위하고 [[이성계]]의 섭정에 일조한 것에 연유가 있다.</ref>·國太妃<ref group="註">공양왕의 생모 복녕궁주(福寧宮主) 왕씨를 국태비(國太妃·國大妃)로 삼았으며 예우는 왕대비와 동일토록 했다. 국태비의 어원은 중국 전국시대 열왕들이 왕비 출신이 아닌 생모를 봉작한 작위인 [[국대부인|국태부인]]으로, 훗날 국태비는 조선 경종 때 경종의 생모인 [[희빈 장씨]]가 추존된 작위인 부대빈의 어원이 되었으며, 국대부인은 조선 철종 때부터 종실 부인으로서 왕의 생모가 된 여성의 작위인 부대부인의 어원이 된다. 이는 조선 세종 때 제후국에서 작위에 국호(國號)를 쓰는 것이 온당치 않다는 이유로 국(國)을 다음 행정 단위인 부(府)로 낮췄기 때문이다.</ref>)를 썼다.
 
== 조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