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2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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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2세'''({{lang|en|Henry II}}, [[1133년]] [[3월 5일]] - [[1189년]] [[7월 6일]])은 [[플랜태저넷 왕가]]의 첫 번째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이다(재위 [[1154년]] - 1189년). [[앙주 백작]], [[메인 백작]], [[노르망디 공작]], [[아키텐 공작]], [[낭트 백작]]이기도 하다. 모친은 [[헨리 1세]]의 딸로 영국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주장하면서 여영주에 올랐던 [[신성로마제국의 마틸다|마틸다]]이고, 부친은 [[중세 프랑스|프랑스]]의 명문 귀족 [[앙주 백작]] [[조프루아 플랜태저넷]]이다.
 
외할아버지 헨리 1세 시대의 영토와 권리를 수복하기수복하고자 위해정력 정력적이고,있고 필요할 경우 무자비한때는 통치자가무자비하게 되기도통치하기도 했다. 왕위계승 분쟁 시의 혼란한 틈을 타 반기를 든 영주들을 굴복시켜굴복하게 해 잉글랜드와 웨일즈에서 헤게모니를주도권을 재구축했으며, [[앙주]], [[멘느]], [[뚜렌느]]에 대한대상으로 한 전면에 전면적인걸친 통치권을 획득했다.
 
[[1151년]] [[루이 7세]]의 전처였던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결혼하면서여공(女公)과 그녀가혼인하면서 그 여자가 소유한 영지인 광대한 [[아키텐]] 지방의 영지를자신의 획득하게영지로서 되었다차지한다.
 
프랑스에서의프랑스에서 영토 문제로 루이 7세와 몇 십년 간수십년간 다투었는데, 숱한 평화 회담과 많은 조약들을조약을 체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로 인한체결했는데도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러면서도않았으면서도 헨리 2세는 [[브르타뉴]] 지방을차지해 획득해 동쪽으로는동으로는 중부 프랑스, 남쪽으로는남으로는 [[툴루즈]] 지방까지까지 지배권을 넓혔다확장하는 일변, 잉글랜드와 노르망디에서 다양한 사법 체계 개혁을 추진해 미래 잉글랜드 법을 정초했고 왕실 재정과 통화를 재정비하였다. 잉글랜드 교회와 꽤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교회에 대한 왕권 지배 문제와 조직 개편 문제로 친구였던 켄터베리의 대주교 [[토머스 베켓]]과 1160년대 내내 계속 반목했고 버켓은 [[1170년]]에 결국 살해됐다.
 
엘레오노르와의 사이에서 많은 아이가 태어났으나, 만년에 들어서면서 복잡한 그의자신의 영토에영토을 대한대상으로 한 상속 문제로 아들들과 갈등을 빚었고,갈등했고 여기에 아들들에아들들을 대상으로 대한 엘레오노르의 충동과 루이 7세와 그의그 사람의 아들인 [[필리프 2세 (프랑스)|필리프 2세]]의 이간 정책까지 겹치면서 크나큰크게 고통을 받았다고통받았다. [[1173년]] 장자인 '[[젊은 헨리]]'가 불만을 품고 반역을 일으키자반역하자 동생인 [[리처드 1세|리처드]]와 [[브르타뉴 공작 조프루아 2세|제프리]]와 엘레오노르까지 합류했고, 프랑스, 스코틀랜드, 플랑드르, 불로뉴불로뉴까지 지방까지헨리 헨리에게2세에게 대항했다. [[1173년]]에서 [[1174년]]까지 대반란은 헨리의헨리 2세의 영토 전역으로 번졌으나비화했으나 헨리의헨리 2세의 군사력과 지역 영주들의영주들이 도움으로도운 덕분에 진압되었다. 승리를승리한 거둔헨리 헨리는2세는 관용을 베풀면서 자신의 위세를 높이려고 했으나 승리는 일시적이었고일시였고 아들들은 여전히 반항적이었다반항했다. [[1183년]] 제프리는 또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재반란했으나 실패하고 죽게되었다죽었다.
한편으로 잉글랜드와 노르망디에서 다양한 사법체계의 개혁을 추진하여 미래의 영국 법의 기초를 닦았으며, 왕실 재정과 통화를 재정비하였다. 영국 교회와는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교회에 대한 왕권의 지배 문제와 조직 개편 문제로 친구였던 켄터베리의 대주교 [[토머스 베켓]]과 1160년대 내내 반목이 계속되었고, 결국 [[1170년]] 베켓은 살해되고 말았다.
 
막내 아들 [[존 (잉글랜드)|존]]을 아꼈던 헨리는헨리 2세는 존에게 물려줄 영지를 구하기 위해구하고자 아일랜드를 침공할 정도였으나, 존은 그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했다불만족했다. 리처드는아버지인 헨리 아버지가2세가 존에게 왕위를 물려줄물려줄까 우려한 우려해리차드는 필리프 2세와 연합하여 [[1189년]]에 전쟁을흥융했고 일으켰고,헨리 헨리가2세가 아끼던 존마저 리처드에게 가담했다. 이 전쟁에서 패배한 헨리 2세는 앙주로 은퇴하였고 그곳에서 죽음을 맞았다죽었다.
엘레오노르와의 사이에서 많은 아이가 태어났으나, 만년에 들어서면서 복잡한 그의 영토에 대한 상속 문제로 아들들과 갈등을 빚었고, 여기에 아들들에 대한 엘레오노르의 충동과 루이 7세와 그의 아들인 [[필리프 2세 (프랑스)|필리프 2세]]의 이간 정책까지 겹치면서 크나큰 고통을 받았다. [[1173년]] 장자인 '[[젊은 헨리]]'가 불만을 품고 반역을 일으키자 동생인 [[리처드 1세|리처드]]와 [[브르타뉴 공작 조프루아 2세|제프리]]와 엘레오노르까지 합류했고, 프랑스, 스코틀랜드, 플랑드르, 불로뉴 지방까지 헨리에게 대항했다. [[1173년]]–[[1174년]]의 대반란은 헨리의 영토 전역으로 번졌으나 헨리의 군사력과 지역 영주들의 도움으로 진압되었다. 승리를 거둔 헨리는 관용을 베풀면서 자신의 위세를 높이려고 했으나 승리는 일시적이었고 아들들은 여전히 반항적이었다. [[1183년]] 제프리는 또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죽게되었다.
 
막내 아들 [[존 (잉글랜드)|존]]을 아꼈던 헨리는 존에게 물려줄 영지를 구하기 위해 아일랜드를 침공할 정도였으나, 존은 그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리처드는 아버지가 존에게 왕위를 물려줄 걸 우려해 필리프 2세와 연합하여 [[1189년]]에 전쟁을 일으켰고, 헨리가 아끼던 존마저 리처드에게 가담했다. 이 전쟁에서 패배한 헨리 2세는 앙주로 은퇴하였고 그곳에서 죽음을 맞았다.
 
== 생애 ==
=== 출생과 초기 생활 ===
[[1133년]] [[르망]]에서 [[앙주 백작]] [[조프루아 5세 플랜태저넷]](Geoffrey V of Anjou)과 [[마틸다 (잉글랜드)|마틸다]]의 첫째 아들로장자로서 태어났다. 어머니 마틸다는 [[헨리 1세]]의 딸로딸로서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5세]]에게 시집을 갔다가 미망인이혼인했다가 과부가 후에되고서 앙주 백작 [[조프루아 플랜태저넷]]과 재혼했다.
 
[[1134년]]에 헨리 1세가1세 죽은 이후몰후, 유일한 합법적합법 상속자인 어머니 마틸다 대신에 [[잉글랜드의 스티븐|스티븐]]이 잉글랜드 왕위를 차지했다. 이후차지하고서 마틸다는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면서 다툼을 벌여쟁권해 [[1141년]]에 여영주의 자리까지 올랐으나 결국 스티븐에게 다시왕위를 왕위를결국 내어주어야 했다. [[1148년]] 마틸다는 잉글랜드에서 물러나 아들 헨리의헨리 이권을2세의 보호하기이권을 위해서보호하고자 노력했다.
 
어렸을 때 헨리는헨리 잉글랜드에서2세는 교육을잉글랜드에서 받았지만교육받았지만 [[스티븐]] 치하에서 문제가문제에 휘말릴 것을 염려한 모후 마틸다에 의해 1144년 노르망디로 가서 생활했다.
 
=== 노르망디 공작과 앙주 백작 시절 ===
1150년 은퇴한 마틸다로부터마틸다에게 노르망디 공작 칭호을 물려받고,상속받고 1151년 아버지 조프루아가 죽자 앙주백작을앙주 백작을 계승하였다.
 
[[1152년]] 노르망디 공작에 오른 후에 얼마되지 않아 프랑스 왕 [[루이 7세]]의 전처였던 아키텐 여공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엘레오노르]]와 결혼였다. 동시에 엘레오노르로부터 막대한 지참금으로 [[푸아티에]], 기엔, [[가스코뉴]]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 결혼에서 여덟명의 자식([[푸아티에 백작 기욤 9세|윌리엄]], 헨리, 리처드, 제프리, 존, 마틸다, 엘리오노르, 조안)을 슬하에 두었다.
 
[[1152년]] 노르망디 공작에 오른 후에오르고서 얼마되지 않아 프랑스 왕 [[루이 7세]]의 전처였던 아키텐 여공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엘레오노르]]와 결혼였다. 동시에혼인하면서 엘레오노르로부터엘레오노르에게 막대한 지참금으로지참금으로서 [[푸아티에]], 기엔, [[가스코뉴]]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 결혼에서 여덟명의혼인에서 자식 여덟 명([[푸아티에 백작 기욤 9세|윌리엄]], 헨리, 리처드, 제프리, 존, 마틸다, 엘리오노르, 조안)을 슬하에 두었다.
=== 영국 국왕 ===
[[1153년]] 군사를 이끌고 잉글랜드에 상륙하여, 스티븐의 둘째 서자에게 부르고뉴 공작직을 넘기는 조건으로 [[잉글랜드]] 왕위계승권을 확약받는 [[윌링포드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해 말 잉글랜드에 상륙하여 북해안 영지를 탈취했지만 스티븐 왕이 묵인하였다.
 
=== 영국잉글랜드 국왕 ===
[[1154년]] 스티븐왕이 죽자 그의 서자에게 [[부르고뉴 공작]]직을 넘기고 플랜태저넷왕가 출신의 잉글랜드의 왕으로 즉위했다. 한편 프랑스왕 루이 7세와 싸워서 차지한 브르타뉴를 합쳐서 노르망디 주변 서부 프랑스의 영지를 차지했다.
[[1153년]] 군사를 이끌고 잉글랜드에 상륙하여, 잉글랜드 왕 스티븐의 둘째 서자에게 부르고뉴 공작직을 넘기는 조건으로 [[잉글랜드]] 왕위계승권을왕위 계승권을 확약받는 [[윌링포드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해당년 말 잉글랜드에 상륙하여 북해안북안 영지를 탈취했지만 스티븐잉글랜드 왕 왕이스티븐이 묵인하였다.
 
[[1154년]] 스티븐왕이스티븐 왕이 죽자 그의그 사람의 서자에게 [[부르고뉴 공작]]직을 넘기고 플랜태저넷왕가플랜태저넷 왕가 출신의 잉글랜드의잉글랜드 왕으로왕으로서 즉위했다.즉위한 한편일변, 프랑스왕 루이 7세와 싸워서 차지한 브르타뉴를 합쳐서합해 노르망디 주변 서부 프랑스의 영지를 차지했다.
젊은 왕은 외모적으로 위엄이 부족했다. 작은 키에 땅딸막한 체격이었고 수척한 외모였다. 얼굴은 주근깨가 난 마른 얼굴에 홀쭉해 보였고, 짧게 자른 황갈색 머리카락과 회색 눈이었다. 그리고 그는 아무렇게나 옷을 입어서 맵씨도 없었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뚱보가 되었다. 그러나 처음에 그는 침착하고 냉정하게 처신하여 인품은 주목을 받았고 사람들의 호감을 얻었다. 그러나 갈수록 그는 성난 짐승처럼 억제할 수 없는 성미를 보이기도 했고, 때로는 냉혹하고 무자비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젊은 왕은 외모적으로외모상 위엄이 부족했다. 작은 키에 땅딸막한 체격이었고 수척한 외모였다. 얼굴은 주근깨가 난 마른 얼굴에 홀쭉해 보였고, 짧게 자른 황갈색 머리카락과 회색 눈이었다.눈이었으며, 그리고 그는옷을 아무렇게나 옷을 입어서 맵씨도 없었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뚱보가 되었다. 그러나되었으나 처음에 그는그 사람은 침착하고 냉정하게 처신하여 인품은 주목을주목받았고 받았고 사람들의사람들에게 호감을 얻었다. 그러나얻었으나 갈수록 그는 성난 짐승처럼 억제할 수 없는 성미를 보이기도드러내기도 했고, 때로는 냉혹하고 무자비함을무자비한 성정을 보여주기도노출하기도 했다.
=== 영토확장 ===
1171년 아일랜드를 병합하고 [[1173년]]에는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에서 이겨 잉글랜드의 국력을 향상시켰다.
 
=== 행정/사법제도영토 개혁확장 ===
1171년 아일랜드를 병합하고 [[1173년]]에는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에서전에서 이겨 잉글랜드의잉글랜드 국력을 향상시켰다신장하게 했다.
즉위 직후부터 세출 파악에 나서 재정의 정비와 함께 조세 제도에 대한 꼼꼼한 기록과 지출 수납에 대한 통제에 대해 세심히 신경썼다. [[1166년]], 헨리 2세는 배심제도를 도입하였으나 왕권강화를 중시했던 그는 교회 사법권을 두고 캔터베리의 대주교 [[토머스 베켓]]과 반목했다.
 
=== 행정·사법 제도 개혁 ===
1166년 말부터는 배심제도의 정비에도 힘써 성직자와 귀족들의 범죄행위와 월권에 대한 단속을 선포했다. 이전 [[1164년]]에도 헨리 2세는 성직자의 범죄를 교회법원뿐만아니라 세속법원에서도 재판할 수 있는 [[클라렌던 헌장]]을 제정하려 했다. 헌장에는 교회에서 임의로 재판을 하는, 교회재판권 금지의 조항을 추가하였다. 베켓이 이끄는 주교단은 이 법이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위반한다며 격렬히 반대했다. 또한 시골 백성들을 위한 순회재판소의 확충과 문자 교육을 장려했다.
즉위 직후부터직후 세출 파악에 나서 재정의재정 정비와 함께조세제도을 조세꼼꼼히 제도에 대한 꼼꼼한 기록과기록하고 지출 수납에수납 대한통제를 통제에세심히 대해신경 세심히 신경썼다썼다. [[1166년]], 헨리 2세는 배심제도를배심제를 도입하였으나 왕권강화를왕권 강화를 중시했던 그는그 사람은 교회 사법권을 두고 캔터베리의 대주교 [[토머스 베켓]]과 반목했다.
 
1166년 말부터는 배심제도의배심제 정비에도정비에 힘써매진하기 시작해 성직자와 귀족들의 범죄행위와 월권에 대한월권을 단속을단속하겠다고 선포했다. 이전 [[1164년]]에도 헨리 2세는 성직자의 범죄를 교회법원뿐만아니라교회 세속법원에서도법원뿐만 재판할아니라 세속 있는법원에서도 재판 가능한 [[클라렌던 헌장]]을 제정하려 했다. 헌장에는 교회에서 임의로제멋대로 재판을 하는재판하는, 교회재판권교회 재판권 금지의금지 조항을 추가하였다. 베켓이 이끄는 주교단은 이 법이 일사부재리의일사부재리 원칙을 위반한다며위반한다면서 격렬히 반대했다. 또한반대했고 시골 백성들을백성을 위한배려한 순회재판소의순회재판소 확충과 문자 교육을 장려했다.
[[1170년]] [[12월 29일]], 4명의 기사가 헨리 2세의 환심을 살 속셈으로 캔터베리에서 베켓 대주교를 살해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네 기사는 헨리 2세가 분노하여 ''"이 몹쓸 대주교를 없애줄 사람이 없단 말인가!"'' 하고 외치는 것을 듣고서 베켓을 죽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1170년]] [[12월 29일]], 4명의기사 기사가네 명이 헨리 2세의 환심을 살 속셈으로 캔터베리에서 베켓 대주교를 살해했다죽였다. 전해지는전설을 이야기에좇으면, 따르면기사기사는명은 헨리 2세가 분노하여 ''"이 몹쓸 대주교를 없애줄없앨 사람이 없단 말인가!"''{{출처}} 하고하는 외치는 것을고함을 듣고서 베켓을 죽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결심했다.
인망이 높던 토머스 베켓이 교회당에서 비참한 죽음을 당하자 헨리 2세는 비난에 시달렸고 헨리 2세 자신도 정치적 이유로 대립하였으나 깊이 존경하고 있던 베켓의 죽음에 괴로워했다. [[1173년]] 베켓은 성인으로 시성되었고, 이듬해 [[1174년]] 헨리 2세는 토머스 베켓의 무덤 앞에서 참회했다.
 
또한인망이 만약의높던 사태를토머스 대비한베켓이 교회당에서 비참하게 살해당하자 헨리 2세는 비난에 시달렸고 헨리 2세 자신도 정치시상 이유로 대립하였으나 깊이 존경하던 베켓이 살해당해서 괴로워했다. [[1173년]] 베켓은 시성되었고 익년 [[1174년]] 헨리 2세는 토머스 베켓의 무덤 앞에서 참회했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용병과 민병으로 구성된 국왕 친위대를 창설하여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였다.
 
=== 아들들과의아들들과 갈등 ===
말년에만년에 헨리 2세는 왕위를 막내 아들 존에게 물려물려주려 주려 했다. 하지만했지만, 그것을 안 셋째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리처드]]는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와 내통 하여내통하여 아버지인 헨리 2세를 공격했고 산으로 쫓겨나간 헨리 2세는 막내 [[잉글랜드의 존|존]]에게 도움을도와달라고 받으려하려고 했으나 존 왕자는존은 형인 리처드의 편이 되었다.
 
막내 아들 [[존 (잉글랜드)|존]]을 아꼈던 헨리는헨리 2세는 존에게 물려줄 영지를 구하기 위해구하고자 아일랜드를 침공할 정도였으나, 존은 그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했다불만족했다. 리처드는 아버지가 존에게 왕위를양위를 물려줄우려한 리차드는 프랑스 우려해 필리프 2세와 연합하여연합해 [[1189년]]에 전쟁을 일으켰고,흥융했고 헨리가 아끼던 존마저 리처드에게 가담했다. 결국 충격을가담하자 받은충격받은 헨리 2세는 [[1189년]] 죽고결국 말았다죽었다.
 
== 기타 ==
재위기간은재위 기간은 34년이었으나 잉글랜드에서 지낸 기간은 통틀어 14년뿐이었다. 또한14년뿐이고 [[1170년]]부터에서 [[1183년]]까지는 아들인 [[청년왕 헨리]]에게 사실상의 실권을 넘긴이양한 상태였다. 그러나상태였으나 [[1183년]] [[청년 헨리]]가 죽자 다시 잉글랜드를 오가며오가면서 정무를 다시 보았다.
 
== 가계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