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메이 황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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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황 및 황실 가족들과의 관계 ==
[[쇼와 천황]]의 부인인아내인 [[고준 황후|나가코]](良子)에게는 시어머니로서 어려운 존재였다고 한다. 황족 출신 구니노미야(久邇宮) 집안의가문의 적출(嫡出) 소생으로 신위가 여왕(女王)이었던 며느리에 대한 시기(데이메이 황후 자신은 고셋케인 구조 집안 출신이지만 적통이 아닌 서출이었다) 같은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구니노미야 집안도가문도 외척이라는 점을 내세워 제멋대로 구는 일이 많았으므로, 이 점도 데이메이 황태후가 나가코 황후를 좋게 봐주지 않았던 요인으로 여겨지고 있다). 더군다나 다소 차분한 성격이었던 나가코에나가코 황후에 비해, 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고엔지 부근의 농가에서 사토코로서 활달한활달하게 성격으로뛰어놀며 자라난 데이메이 황태후는 서로 성격도 맞지 않았다. 데이메이 황태후가 나가코 황후에게 주는 주의는 여관장(女官長)을 통해 이루어졌지만, 당시 황태후를 섬겼던 여관장 다케야 쓰네코(竹屋津根子)와 나가코 황후를 섬겼던 여관장 다케야 시즈코(竹屋志計子)는 자매였음에도 좀처럼 서로 마주 보기 어려웠다고 회상하고 있다.
 
궁중에서 가까이서 섬기던 여관장이나 여관이 실제로 고부간 충돌을 목격한 것은 다이쇼 천황이 사망하기 수개월 전의 일로, 쇼와 천황(당시 황태자) 부부가 부황의 요양처인 하야마 별장에 문병했을 때였다. 나가코 황후(당시 황태자비)가황태자비는 시어머니인 데이메이 황후 앞에서 긴장한 나머지 열을 내리기 위해 물을 적신 손수건을 맨손이 아니라 장갑(일본의 여성 황족은 외출 때는 장갑을 착용한다)을 착용한 채로 짜느라 장갑이 젖어버렸고, 그걸 본 데이메이 황후가 "(너는 무엇을 시켜도) 여전히 서투르구나.!!"라고 쏘아붙이는데 나가코 황후는황태자비는 아무 말도 못하고 묵묵히 있을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두뇌가 명민하고 다소 다부진 성격이긴 했지만 손아랫사람에게도 직접 질책하는 일이 없었던 데이메이 황후였기에, 이 일을 지켜본 여관들에게 이 사건은 황후의고부 고부간간의 불화를 드러낸 셈이 되었다.
 
반면 다른 며느리로 지치부노미야 · 다카마쓰노미야 ·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의 비들과는 고쇼에서의 식사나 다과회에도 종종 불러 귀여워했다고 한다. 특히 차남 지치부노미야의 비였던 세쓰코(勢津子) 비를 마음에 들어하여 서로 친교가 깊었고, 매년 삼짇날마다3월 3일 [히나마쓰리]마다 세쓰코 세쓰코가비가 출가할시집올들여온가져온 히나 인형을 저택에 장식해놓고 그것을 데이메이 황후에게 보이곤 했다고 한다. 세쓰코는 만년의 회상에서 이때의 일을 "아드님 네 분이 모두 친왕 전하(아들)셨으므로 매년 즐거운 마음으로 기대하고 계셨겠지요"라고 말하고 있다.
 
여관 제도를 폐지하는 등 궁정내 개혁을 추진했던 장남 쇼와 천황에게 반발해 자신의 오미야 고쇼에서만은 기존의 궁정 제도를 유지하게 했지만, 쇼와 천황과의 관계가 결코 나쁜 것은 아니었으며, 전쟁 때는 전황이 악화되는 와중에도 피난을 거절하는 어머니를 염려한 것이 쇼와 천황이 끝까지 도쿄를 떠나지 않았던 한 요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황후의 애정은 차남인 지치부노미야에게 다소 쏠려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황후가 지치부노미야를 그녀의 생일에 낳았다는 것에서 황후가 강한 인연을 느낀 탓이었다고도 한다. 지치부노미야의 비로 막부 말기 조적(朝敵)으로 몰렸던 마쓰다이라 가타모리(松平容保)의 손녀 세쓰코를 강하게 추천한 것도 데이메이 황후로 실제로 혼인이 성립된 것 또한 황후의 의향이 크게 작용한 결과였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