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룡: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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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음반 상점을 운영하였고, 두 살 아내의 여동생 이난영을 가수로 데뷔시켰다.
 
이난영은 인기 가수가 되어 악극단에서 만난 작곡가 [[김해송]]과 결혼하였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작곡가였던 김해송은 처남이 된 이봉룡에게 작곡을 가르쳐주었다. 이봉룡은 1930년대 후반에 데뷔하여 동생 이난영이 부른 〈[[목포는 항구다]]〉(1942)가 크게 히트하는 등 인기 작곡가로 활동했다. 이 노래는 〈목포의 눈물〉과 함께 지금까지도 목포를 상징하는 곡으로 남았다.
 
이봉룡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가수인 [[남인수]]의 〈낙화유수〉와 〈남아일생〉 등 널리 불리는 노래를 계속 만들었다.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군국가요 작곡에 참여한 일이 있다.<ref>{{뉴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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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신민요의 여왕으로 불리던 [[기생]] 출신 가수 [[이화자]]의 〈마지막 필적〉(1942)과 같은 해 발표된 [[장세정]]의 〈아가씨 위문〉 등이 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음악 부문에 포함되었다.
 
남북 분단을 묘사한 〈달도 하나 해도 하나〉로 광복 후에도 명성을 유지하던 중, [[1950년]]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김해송이 행방불명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봉룡은 김해송 실종 이후 동생 이난영을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했으며, 이난영은 7남매를 혼자 키우며 어렵게 생활해야 했다. 전쟁이 끝나도 김해송은 [[조선인민군]]에게 사살당했다는 소문만 남기고 돌아오지 않았고, 월북했을 가능성도 있는 김해송의 곡들은 대한민국에서 자유롭게 부를 수가 없었다. 이 가운데 이봉룡이 작곡한 것으로 작곡자 이름을 바꾸어 살아남은 곡도 있었다. 장세정의 〈연락선은 떠난다〉, [[고운봉]]의 〈[[선창 (노래)|선창]]〉, [[백년설]]의 〈고향설〉, 이화자의 신민요 〈화류춘몽〉 등 그 수는 적지 않다.
 
전쟁이 끝나도 김해송은 [[조선인민군]]에게 사살당했다는 소문만 남기고 돌아오지 않았고, 월북했을 가능성도 있는 김해송의 곡들은 대한민국에서 자유롭게 부를 수가 없었다. 이 가운데 이봉룡이 작곡한 것으로 작곡자 이름을 바꾸어 살아남은 곡도 있었다. 장세정의 〈연락선은 떠난다〉, [[고운봉]]의 〈[[선창 (노래)|선창]]〉, [[백년설]]의 〈고향설〉, 이화자의 신민요 〈화류춘몽〉 등 그 수는 적지 않다.
후에 이난영과 김해송의 딸들이 결성한 음악 그룹 [[김시스터즈]]의 멤버 중에는 이들과 외사촌 사이인 이봉룡의 딸도 포함되어 있다. 이봉룡은 음반 기업을 운영하다가 [[1960년대]] 후반에 딸의 초청으로 [[미국]]에 이민하여 생활했다. 말년까지 작곡 활동을 계속했으며, [[1986년]]부터 잠시 [[서울]]에 들러 소일하던 중 사망했다.
 
후에 이난영과 김해송의 딸들이 결성한 음악 그룹 [[김시스터즈]]의 멤버 중에는 이들과 외사촌 사이인 이봉룡의 딸도 포함되어 있다. 이봉룡은 1956년에 대한레코드작가협회 부회장으로 선출되었고, 1958년에는 센츄리(Century)레코드 전속작곡가로 있었으며, 이후 음반 기업을 운영하다가 [[1960년대]] 후반에 딸의 초청으로 [[미국]]에 이민하여 생활했다. 말년까지 작곡 활동을 계속했으며, [[1986년]]부터 잠시 [[서울]]에 들러 소일하던 중 사망했다.
 
말년까지 작곡 활동을 계속했으며, 1961년부터는 직접 엘케엘(LKL)레코드를 운영하기도 했다. [[1969년]]에 자녀들이 있는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음악 활동을 중단했다. [[1986년]]에 잠시 귀국하여 여관에서 기거하다가 [[1987년]] [[1월 9일]] 사망했다. <ref>《문화원형백과》, 오케레코드와 조선악극단(이봉룡, 李鳳龍), 한국콘텐츠진흥원(문화콘텐츠닷컴, 2009년)</ref>
 
== 같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