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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개경은 [[장풍득수]](藏風得水)의 형국이 많고 내기불예(內氣不洩)의 명당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산이 첩첩이 둘러 있어서 국면(局面)이 넓지 못하고 또 물이 전부 중앙으로 모여 들어서 수덕(水德)이 순조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것을 비보하기 위해 많은 사탑(寺塔)을 세웠다.
 
한편 조선은 한양에 도읍을 정하면서 나라의 정통성을 구변지국(九變之局)에서 찾았다. 구변지국(九變之局)은 ‘구변진단도(九變震檀圖)’·‘구변도국(九變圖局)’·‘구변도(九變圖)’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한민족은 지금까지 9천여년 동안 9번의 나라가 세워졌다고 보는 것이다. 구변진단도(九變震檀圖)는 아홉번 변하는 진단의 그림, 일종의 도참서로 『구변진단도』(九變震檀圖)의 구변(九變)은 국도(國都)의 변천(變遷)을 뜻한다고 해석했다.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 [[권근]](權近, [[1352년]] ∼ [[1409년]])은 [[조선 태조]] [[조선 태조|이성계]]의 ‘건원릉신도비명(建元陵神道碑銘)’에서 “예전부터 ([[고려]]) [[서운관]](書雲觀)에 전하던 비기(秘記)에 ‘구변진단지도(九變震檀之圖)’가 있는데 ‘나무를 세워 열매(아들)을 얻는다(建木得子)’는 설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목자(木子)는 이(李)씨를 파자한 것으로 역시 개국한다는 뜻이다. ‘구변진단도’란 ‘아홉 번 변하는 진단(震檀, [[단군조선]])의 그림’이란 일종의 도참서(圖讖書)로, 천문(天文)·역수(曆數)·기후 등을 관측하던 [[고려]] [[서운관]]에서 일부러 감추었다는 이야기다.
 
[[1445년]]([[조선 세종]] 27년) [[4월]]에 편찬되어 [[1447년]]([[조선 세종]] 29년) [[5월]]에 간행된《[[용비어천가]]》 3권 15장에는 “揚子江南(양자강남) 리샤 使者(사자) 보내신 七代之王(칠대지왕) 뉘마리가 / 公州江南(공주강남) 저샤 子孫(자손) 치신 九變之局(구변지국)이 사디리잇가”라고 ‘구변진단도’에 대한 언급을 기록하고 있다. <ref>《한국민족문화대백과》, 구변지국(九變之局), 한국학중앙연구원(1998년)</ref>
 
풀이해보면 “중국 진시황이 양자강 강남(금릉)을 꺼리시어 사자(使者)를 보내신들 (이미 하늘에서 정한) 칠대의 왕을 누가 막겠습니까. / (고려 태조가) 공주의 강남(전주지역)을 두려워하시어 그 자손을 가르치신들, 아홉 번 바뀌리란 이 나라 판국이 사람의 뜻이겠습니까.”
 
또한 “공주강 남 저샤 자손 치신 구변지국이 사디리잇가(公州江南, 畏且訓嗣, 九變之局 豈是人意).”라는 노래가 보이는데, 이는 이씨 건국이 하늘의 뜻에 의한 것임을 밝혀 왕조의 정통성을 주장했다.
{{참고|구변진단도|설명=구변진단도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고려시대]] 말에 쓰인 《[[서운관|서운관비기]](書雲觀秘記)》라는 책에 "이씨가 [[한양]]에 도읍하리라"라는 설이 퍼지자, [[한양]] [[삼각산]] 아래 [[오얏나무]]가 무성하다는 말을 듣고 이씨가 흥할 징조라 여겨 이곳의 오얏나무를 베기위해 벌리사를 보냈다는데서 나왔다.
 
현재 [[서울시]] [[강북구]] [[번동]]을 "벌리(伐李)"라고 칭하였고 후에 "번리(樊里)"가 되었다. 당시 번동의 자연 마을은 위치에 따라 윗벌리・가운데벌리・아랫벌리로 불렀다고 한다.<ref>[http://dong.gangbuk.go.kr/site/beon1/sub.do?key=1147 번동 지명 유래], 2012년 8월 27일 확인</ref>
<ref>[[1936년]] [[8월 7일]] [[동아일보]] 7면 사회 기사(가십)에는 벌리(伐李)와 왕심리(枉尋里)라는 제목으로 '惠化門外(혜화문외) 十餘里(십여리)쯤 되는곳인데 그 本名(본명)은 伐李(벌리)였다. 高麗(고려)의 書雲觀秘記(서운관비기)에 "李王都漢陽(이왕도한양)"이란 說(설)이 있는 故(고)로 高麗忠肅王(고려충숙왕)이 크게 걱정하야 漢陽(한양)에 南京府(남경부)를 設立(설립)하고 李姓(이성)을 가진사람으로 府尹(부윤)을 삼으며 三角山下(삼각산하)에 李樹(이수)를 많이 심어서 그것이 茂盛(무성)하면 문득 斫伐(작벌)하야 地氣(지기)를 누르고 地名(지명)을 伐李(벌리)라 했드니…'라는 내용이 나온다. [[강북구]] 번동에 대한 얘기이다.</ref>
{{참고|번동|설명=벌리사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이상에서 대강 보아 온 바와 같이 풍수지리설은 왕가(王家)에서는 물론 민간에게도 신앙하는 사람이 많았다. 오늘날도 《[[정감록]]》(鄭鑑綠)을 믿고, 한때 [[계룡산]](鷄龍山)이 서울이 된다는 풍문이 돌았다. 아직도 민간에서는 풍수설을 좇아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니 하여 산소(山所)를 잘 써야 자손이 복을 받는다고 관심을 갖는 사람이 적지 않다.<ref name="풍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