퀘벡 (도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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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년 7월 3일, 프랑스의 탐험가이자 외교관인 새뮤엘 드 샹플랭이 세인트 로렌스 강에 [[이로쿼이족]]이 버려둔 정착지인 스타다코나에 퀘벡이라는 정착지를 건설하였다. [[1629년]] [[영국]]이 차지했다가 곧 다시 [[프랑스]]에 넘어가는 등 여러 차례 [[영국]]과 [[프랑스]] 간에 쟁탈전이 벌어졌다. 그 사이 이 곳은 [[프랑스]]의 북아메리카 식민지인 [[뉴프랑스]]의 행정 중심지로 발전하였으나, [[1763년]] [[파리 조약]]으로 정식으로 [[영국]]령이 되었다. 그 후로도 [[프랑스]]인은 [[프랑스어]] 사용과 관습 유지를 인정받았으나, [[영국]]계와의 대립이 심했다.
프랑스 지배가 끝난 1763년에 다다라서는 퀘벡은 인구 8천 명의 마을로 성장하였으며 이곳의 고풍스러운 건축물과 성벽과 저택은 근처에 있는 생장과 생로쉬의 판자촌과 대비를 이루었다. 퀘벡은 도시풍이 감도는 작은 식민지 도시였지만 주변 시골 경치와 잘 어우러졌으며 인근 주민들은 잉여 농산물과 장작을 프랑스에 거래하기도 하였다.
=== 영국령 ===
1775년 12월 31일, 미국에서 한창 영국에 맞서 [[미국 독립 혁명|독립 혁명]]이 일어나던 도중, 미국 독립군들이 퀘벡을 영국령으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해 [[캐나다 침공 작전]]의 일환으로 영국군과 [[퀘벡 전투]]를 벌였다. 이 도중 [[리처드 몽고메리]]가 전사하고 [[베네딕트 아놀드]]가 부상당했으며, [[대니얼 모건]] 등 400명 이상이 포로가 되었다. 미 독립군의 패배에 따라 퀘벡을 영국으로부터 독립시키고 미국의 일부로 편입하려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미국이 캐나다와 벌이던 [[1812년 전쟁]]은 퀘벡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았지만, 이후 미국군의 공격을 염려하여 영국군은 1820년에 [[퀘벡 시타델]]을 건설하였다. 미국군은 1812년 이후로 캐나다를 공격하지 않았지만, 시타델은 1871년까지 영국군 최대의 주둔지로 남게 되었다. 이후 퀘벡 시타델은 여전히 캐나다 국군이 쓰고 있고 관광 명소로 남게 되었다.
1840년, 캐나다 주가 생긴 이후로, 퀘벡은 [[킹스턴 (온타리오 주)|킹스턴]], [[몬트리올]], [[토론토]] 및 오타와와 더불어 주도의 역할을 맡게 되었고 1867년, 오타와가 캐나다 연방의 수도가 되었다. 연방제 국가 건설을 위한 퀘벡 회담과 캐나다 회담이 이곳에서 열렸다.
== 자매 도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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