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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제목= 유관순
|이름= 유관순
|출생일= [[1902년]] [[11월12월 17일16일]]
|출생지= [[대한제국]]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현 [[천안시]] [[목천면병천면]] 용두리)
|사망지= [[일제 강점기]] [[경성부]] 서대문 감옥
|사망일= {{사망일과 나이|1920|9|28|1902|12|16}}
|사망원인= 고문 후유증
|거주지= [[충청남도]] [[천안군]] [[병천면]]에 거주하였음
|국적= {{국기나라|대한제국}} ([[일제강점기]] 日帝强占期)
|별명=
|학력= [[이화학당]] 고등부 1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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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
'''유관순'''(柳寬順, 류관순, [[1902년]] [[11월12월 17일16일]]<ref>1904년 3월 15일생이라는[[호적]]에 설도기재된 있다생년월일이다.</ref> ~ [[1920년]] [[9월 28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일제 강점기]]에 [[3.1운동]]으로부터 시작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천안]]에서 사망하였다.주도하다가 일설에는체포되어 [[1904년서대문형무소]]생이라는에서 설도 있다사망하였다.
 
[[1916년]] [[미국인]] 선교사의 천거로추천으로 [[이화학당]] 초등부 3학년에 편입학하고편입하고, [[1919년]]에 [[이화학당]] 고등부로고등부에 진학하였다. [[3월 1일]] [[3.1 운동]]에 참여하고 [[3월 5일]]의 만세 시위에도 참여하였다. 총독부의 휴교령으로 [[천안]]으로 내려와 후속 만세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가 체포일제에 체포되어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고, [[공주지방법원]]에서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3년을 선고받았다.선고받아 재판형이 확정되었다. 의자를일제에 던진의한 혐의로교도소 [[법정모독죄]]가 추가돼가혹행위로 징역인해 5년으로형기만료를 형량이1개월 늘었으며앞둔 [[1920년]] 수감 중[[9월 고문 후유증으로28일]]에 사망했다.
 
사후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1996년]] [[이화여자고등학교]]는 명예 졸업장을 추서하였다.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의 생가가 복원되어 [[1991년]] [[대한민국의 사적|사적]] 제230호로 지정되었다. [[유관순 열사 유적]]과 천안종합운동장 내 '[[유관순체육관]]'<ref>현재 대한민국한국 남자 프로배구 구단인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 홈 구장으로 사용되고쓰고 있다.</ref>은 유관순의 이름을 딴 것이다. 해방 후 [[박인덕]] 등에 의해 기념사업이 추진되었는데, 일각에서는 일부 [[기독교개신교]] 세력과 [[박인덕]] 등이 자신들의 친일 의혹을 덮기 위해위한 그를불순한 과도하게의도로 미화,개신교계 띄웠다는학교인 이화학당 학생이었던 유관순 열사를 부각시켰다는 의혹도 존재한다있다.
 
== 생애 ==
=== 초기 활동 ===
[[1902년]]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현 [[천안시]] [[목천면병천면]] 용두리)에서 아버지 류중권과 어머니 이소제의 3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고흥]](高興)이다. [[1905년]] 집이 근처 탑원리로 이사했다가 [[1907년]] 무렵 다시 가족을 따라 목천으로용두리로 돌아왔다.
 
=== 이화학당 재학과 만세 운동 ===
[[1916년]]에 개신교계 [[감리교회]] [[충청남도]] [[공주]]교구의 [[미국인]] 여자 [[선교사]] 사애리시 부인([[엘리스 샤프]], Elice. Shape,사부인)의 도움으로추천으로 [[이화학당]](梨花學堂) 보통과 3학년에 교비생으로 편입학하고, [[1919년]] [[이화학당]] 고등부로 진학하였다. 교비생은 학비를 면제받고 졸업후에졸업 후에 교사로 일하는 학생이다. 사부인은 [[여성]]들의 교육에 마음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유관순을 이화학당에 추천하였다학생이었다. [[1919년]] [[1월]]부터 만세 운동 계획에 참여, [[3·1 운동]]이 일어나자, 이 학교이화학당 고등과 1년생으로1년생이었던 유관순은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참가하였고, 연이어 [[3월 5일]]의 [[서울]] 만세시위에만세시위에도 참가하였으나참가하였다. 극적으로 체포를 모면하였다. 그뒤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임시휴교령에임시휴교령을 의해내려 이화학당이 휴교당하자휴교하자 [[3월 8일]] 열차편으로 고향으로천안으로 돌아왔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유관순은 [[교회]]와 청신학교(靑新學校)를 찾아다니며, 서울에서의 독립 시위운동 상황을 설명하고, 이곳에서도천안에서도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조인원]](趙仁元)· 김구응(金球應, [[성공회]] 병천교회에서 운영하던 진명학교 [[교사]] 김구응(金球應) 등의 마을지도자를 규합하여등이 연기·청주·진천 등지의 교회와 유림계를 규합하여, [[4월 1일]](음력으로는음력 [[3월 1일]]) 아우내(並川) 장날을 기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추진하고계획하고 군중을 모았다.모았으며, 이날당일 모인 수천명의 군중을 모아군중들이 독립만세를 선창하며외치며 격렬한맹렬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 아우내 만세 운동 가담과 체포 ===
[[1919년]] [[3월]] 당시 [[천안군]] 목천면에서는[[목천읍|목천면]]에서는 이종성(李鍾成) 등의 주동으로 [[3.1 만세 운동]]에 호응하는 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했으나 사전에 구금당해 실행하지 못했다. 아버지유관순은 부친 유중권의 주선으로 [[3월 9일]] 밤 교회 예배가 끝난 뒤 마을 속장 조인원(趙仁元), 지역 유지 이백하(李伯夏) 등 2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유관순은 사촌언니와 함께 [[경성]]의 상황을 설명하였다. 이어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날을 기해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하고, 안성·목천·연기·청주·진천 등의 마을 유지와 유림계를 규합하기 위한 연락원의 한 사람이 되어 다른 연락원들과 함께 인근 지역을 돌아다니며 시위운동에주민들을 상대로 참여할시위운동 것을참여를 설득했다.
 
[[4월 1일]] 수천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조인원의 선도로 시위가 시작되자 유관순은 시위대 선두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다. 시위가유관순의 전개되던부모 유중권과 시위가이소제는 격화되자시위 현장에서 [[조선총독부]] 헌병은헌병들이 사격을군중을 개시하고향해 그의 아버지총에 류중권맞아 살해되었고, 이소제 등이 살해되고 속장 조인원 등도 총격으로 부상당했다. 자신은 아우내 만세시위 주동자로 잡혔다.일제 헌병에 붙잡힌 처음에는유관순은 미성년자인 점이점을 감안되어감안하여 시인하면범죄를 용서해주겠다는시인하고 제안을수사에 받았으나협조하면 거절하였다.선처하겠다는 제안을 거절하였고, 그는이후 고문을 받았으나 협력자와 기타시위 가담자를 발설하지 않았다.
 
=== 투옥과 최후 ===
유관순은 천안경찰서 일본헌병대에 투옥되었다가 곧 공주경찰서 감옥으로 이감되고이감되었고, 공주재판소로 넘겨져공주지방법원에서 [[구속]] 상태에서상태로 재판을 받았다. 공주지방법원에서[[1919년]]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의 1심재판에서 [[소요죄]] 및 보안법 위반 죄로 징역 3년형을5년을 언도받았으나선고받은 유관순은 이에 불복불복해 항소하였고, 항소하여같은 해 [[5월6월 9일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재판을징역 3년을 선고받은 후 상고를 포기하였다. 받을유관순은 경성복심법원 독립만세를재판 고창하며당시 일제의 한국침략을 규탄, 항의하고·항의하면서, [[조선총독부]] 법률은 부당한 법이며 총독부법에그에 의하여따라 일본 법관에게법관에 재판받음이의해 부당함을재판을 역설하다가받는 의자를것은 집어던져부당함을 [[법정모욕죄]]가 추가로 가산되어 징역 5년형을 언도받았다역설하였다.
 
그러나유관순의 선고형에 대해서는 해방 직후 [[전영택]] 등이 주장한 징역 7년설과7년설을 달리 그는 징역 5년형을 받았다. 후일 [[유관순기념관]]에서 자료를 찾은거론했으나, 결과유관순기념관이 '병천·수신동면 형사사건부가지역 발견되면서형사사건부'를 유관순은찾아내어 공주지방 법원에서 5년형을 받았음을 알 수 있게선고받았음이 되었다확인되었다.<ref>[http://www.cheonan.go.kr/EgovPageLink.do?link=/yugwansun/sub/sub02/sub_06 옥중 투쟁]</ref>' 한다. [[1920년]] [[4월 28일]] [[영친왕]]이 [[일본]] 왕족 [[이방자]]와 결혼하자 형량이특사로 감형되어형이 1년1년6개월로 6개월형으로 줄어들었다감형되었다. 하지만그러나,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중에도 옥안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그때마다 형무관에게 끌려가 모진 악형을구타를 받았다.당해 형기를 불과 1개월 정도 남긴 [[1920년]] [[9월 28일]] 또는 [[12월 16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 후유증 옥사했다. 한때 일제가 그를 사지를 찢어서 죽였다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옥사하였다.
 
[[2013년]] 11월 최근11월에 발견된 자료에 의하면 "유관순, 옥중에서 타살(打殺)"로 기재되어 있다. 국가기록원이 주일대사관에서 이관받아 19일[[11월 사상 처음으로19일]]에 공개한 '3·1운동시 피살자 명부'와 '일본 진재(震災)시 피살자 명부'에는 3·1운동 당시 애국 인사들의 순국 정황과 관동대학살 당시 참상이 생생히 묘사돼 있다. 주일대사관 청사 신축에 따른 이사 과정에서 발견된 이들 명부에는 3·1운동 피살자 중 630명과 관동대지진 피살자 중 290명에 관하여 인적사항과 사망 당시의 정황 등이 기재되어 있다.
 
'3·1운동시 피살자 명부'에서는 유유관순 열사의 순국 당시 주소는 천안군 동면 용두리, 순국 장소는 서대문형무소로 나온다. 순국 상황 난에는 "3·1독립 운동만세로 인하여 왜병에 피검(被檢)돼 옥중에서 타살(打殺) 당함"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주일대사관 청사 신축에 따른 이사 과정에서 발견된 이들 명부에 실린 3·1운동 피살자는 630명, 관동대지진 피살자는 290명이다.
 
이 자료에는 아우네 만세 운동 당일의 희생자도 기재되어 있는데, 유 열사 부친인 유중권 열사의 기록이 먼저 나온다. 순국 경위는 "3·1운동 독립만세로 인하여 총살당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일시는 기미년(己未年·1919년) 3월 1일, 장소는 천안군 병천면 병천리이다. 이는 1987년에 작성한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의 기록과 상당히 일치한다. 보훈처에 따르면 공훈록은 1919년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터의 만세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일본 헌병들은 시위군중을 추격하며 발포하고 칼로 찔렀다고 전하고 있다.
기록으로 아우내 장터 희생자 목록이 확인되었고 '3·1운동시 피살자 명부'에서는 유관순 열사에 관한 기록이 우선 눈에 띈다. 유관순 열사의 순국 당시 주소는 천안군 동면 용두리, 순국 장소는 서대문형무소로 나온다.
 
유중권 열사의 바로 옆에 성명이 "李氏"라고 표기된 여성이 등장한다. 주소·순국장소·순국상황 난에 유중권 열사와 같다는 기호가 표기돼 있어 유관순 열사의 어머니로 알려진 이소제 열사로 추정된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유관순 열사의 아버지 유중권 열사와 어머니 "이씨(李氏)" 등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희생자 명부에서는 유중권 열사와 이씨를 포함해 20명이 같은 장소·날짜·상황에서 순국했다고 적시하고 있다. 국가기록원은 이씨라는 인물을 일단 미확인자로 분류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sec&oid=001&aid=0006605921&isYeonhapFlash=Y "유관순 옥중서 打殺돼"..3·1운동 순국상황 드러나] 연합뉴스, 2013.11.19</ref>
순국 상황 난에는 "3·1독립 운동만세로 인하여 왜병에 피검(被檢)돼 옥중에서 타살(打殺) 당함"이라고 기재됐다. 유 열사가 고문에 시달리다가 순국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만세 운동을 주도하다 감옥에서 맞아 죽었다는 의미로 조사 당시 이같이 기재한 것으로 보인다.
 
3·1운동 당일 희생자 기록이 바로 옆에 등장한다. 일시는 기미년(己未年·1919년) 3월 1일, 장소는 천안군 병천면 병천리라고 기재했다. 아우내 장터가 있는 곳을 이렇게 기재한 것으로 보인다. 유 열사 부친인 유중권 열사의 기록이 먼저 나온다. 순국 경위는 "3·1운동 독립만세로 인하여 총살당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1987년에 작성한 대한민국독립유공자 공훈록의 기록과 상당히 일치한다.그리고 고문을 당아여 사망 하였다
 
보훈처에 따르면 공훈록은 1919년 4월1일(음력 3월1일) 아우내 장터의 만세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일본 헌병들은 시위군중을 추격하며 발포하고 칼로 찔렀다고 전하고 있다. 이 때문에 유관순 열사의 아버지 유중권 열사와 어머니 "이씨(李氏)" 등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했다는 것이다.
 
유중권 열사의 바로 옆에 성명이 "李氏"라고 표기된 여성이 등장한다. 주소·순국장소·순국상황 난에 유중권 열사와 같다는 기호가 표기돼 있어 유관순 열사의 어머니로 알려진 이소제 열사일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
 
만약 그렇다면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유관순 열사의 어머니가 "이씨"로 표기된 것은 3·1운동 피살자 명부와 마찬가지 기록을 토대로 했기 때문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국가기록원은 이씨라는 인물을 일단 미확인자로 분류했다. 희생자 명부에서는 유중권 열사와 이씨를 포함해 20명이 같은 장소·날짜·상황에서 순국했다고 적시하고 있다. <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sec&oid=001&aid=0006605921&isYeonhapFlash=Y "유관순 옥중서 打殺돼"] 3·1운동 순국상황 드러나, 연합뉴스(2013.11.19) 기사 참조</ref>
 
=== 사후 ===
그가유관순이 [[고문후유증]]으로사망한 죽은이틀 이틀 뒤에, 이 소식을 들은 [[이화학당]] 교장 프라이와 월터 선생은 형무소 당국에 유관순의 시체 인도를 요구하였으나 일제는 이를 거부하였다. [[서대문형무소]]는 유관순의 학살을옥중사망을 국제여론에 호소하겠다고 위협하고 강력하게 항의하자 [[서대문형무소]]는 할 수 없이 월터 교장서리에게 시체를 인도하였다. 그러나[[1920년]] 시신[[10월 운반14일]] 과정에서[[정동교회]]에서 시신을김종우 잃어버려목사 후일주례로 가묘를장례식이 조성한다.거행되고, 한때[[이태원]] 그의공동묘지에 시신이안장되었다. 토막나이후 있었다는그의 괴담이존재는 돌기도 했다잊혀졌다. 일설에는 [[서대문형무소]]로부터 유관순의 인수한시신은 이들이이태원 석유상자공동묘지에 속에안장되었으나 이태원 유관순의공동묘지가 시체를일제의 열어보니 토막으로 참살되었다는 것이다.군용기지로 그러나전환됨에 시신을따라 잃어버려미아리 사실공동묘지로 여부는이장하던 규명이 어렵다잃어버렸다.
 
유관순의 관은 이화학당에 인도되어 스승과 동문들의 손에 의하여 [[10월 14일]] [[정동교회]]에서 김종우 목사 주례로 장례식이 거행되고,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이후 그의 존재는 잊혀졌다. 유관순의 시신은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나 이태원 공동묘지가 일제의 군용기지로 전환됨에 따라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하던 중 잃어버렸다.
 
[[1945년]] 광복 후 [[충청남도]]와 [[천안군]]의 협력으로 병천면에 유관순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 건립되었다. 한편 [[1946년]]부터는 [[박인덕]], 신봉조 등 [[이화학당]] 출신 인사들에 의해 기념사업회가 조직되었다. 이 즈음, [[서대문형무소]]로부터 유관순의 인수한 이들이 석유상자 속에 든 유관순의 시체를 열어보니 토막으로 참살되었다는 소문 등이 퍼뜨려졌다. [[1962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단장]](후일 건국훈장 국민장으로 개정)이 추서되었다. 시신을 잃어버려 [[1989년]] [[10월 12일]] 그의 고향 근처에 가묘인 초혼묘를 세웠다.
 
== 연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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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에서 [[3·1 운동]]에 참가. 학생들이 다칠 것을 걱정한 프라이 교장이 3.1운동 참여를 만류했으나, 학교 담을 넘어가서 3.1운동에 참여했다.
* [[1919년]] [[3월 10일]] 모든 학교에 임시휴교령이 내려지자, 유관순은 같은 이화학당을 다니던 사촌 언니 유예도와 함께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갔다.
*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가 아우내(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에서 [[아우내장터 만세운동|독립만세 운동]]을 지휘했다. 이때이 때 [[일본]] 헌병대가 군중에 발포해 유관순의 부모가 목숨을 잃었다. 헌병대는잃었고, 유관순은유관순 체포하여본인은 검사국으로헌병대에 이송하였다체포되었다.
* 유관순은 [[공주시|공주]] 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서울|경성]] 복심법원에 항소, 징역 3년형이 선고되었다.
* [[1920년]] 9월 28일 [[서대문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옥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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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란과 의혹 ==
=== 생년월일형량에 논란대한 중언부언 ===
[[1919년]] 5월9일[[5월 공주지방법원9일]] 법정.공주지방법원은 재판장은 “피고 유관순,유관순에게 징역 5년”이라고5년을 선고했다.<ref name="jungsun">[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70226009012 유관순 열사 1심형량은 징역 5년] 서울신문 2007.02.26, 9면</ref> 당시 재판절차는 지방법원-복심법원-고등법원의 3심제도로 운영됐으며운영되었으며, 유관순 열사의 판결문은 징역 3년을 선고한 경성복심법원의 판결문만 남아 있어 1심 형량은 설왕설래했었다. 유관순 여사와 1년 가까이 함께 복역한 어윤희씨는어윤희는 “유관순'유관순 열사가 6년형을 받았다.”고'고 말한 반면, [[조병옥 박사의]]의 동생 조병호씨는조병호는 “부친'부친(조인원)이 유관순 열사와 함께 7년형을 받았다.”고'고 회고하는 등 관련자들의 증언도 일치하지 않았다.<ref name="jungsun"/> [[2007년]] [[2월 26일]] 병천·동면계 형사사건부 발굴로 유관순의 1심 재판형량은 '징역 5년으로 바로잡히게5년'임이 됐다확인되었다.<ref name="jungsun"/>
1902년 3월 15일(유제한의 ‘순국처녀 유관순전’), 1902년 12월 16일(호적), 1903년 4월 12일(박화성의 ‘타오르는 별’), 1904년 3월 15일(‘순국소녀 유관순전’), 그밖에 1901년생 설 등 그의 출생년월일은 불분명하다. 생일도 3월 15일생 설, 4월 12일생 설, 12월 16일생 설, 3월 15일생 설 등 다양하다.
 
=== 정치적, 종교적 목적의 악용 논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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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이 의도적으로 띄워졌다는 견해도 있다. 유관순 열사가 해방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다가 해방 후, 친일 혐의자인 박인덕과 [[전영택]]이 [[한국]]판 [[잔다르크]]와 독실한 [[기독교]] 신자 등의 이미지를 씌워 인위적 영웅을 만들었다는 의혹도 있다.<ref>[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500&key=20110702.22015211250 <nowiki>[</nowiki>잠깐읽기<nowiki>]</nowiki> 권력화된 종교계 향한 쓴소리 外] 국제신문 2011.07.01</ref> 그리고 [[이화여전]] 출신 친일 인사들의 친일 행적을 은폐하는 목적으로 이용되었다는 의혹이 있다.
 
=== 형량에 대한 중언부언 ===
1919년 5월9일 공주지방법원 법정. 재판장은 “피고 유관순, 징역 5년”이라고 선고했다.<ref name="jungsun">[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70226009012 유관순 열사 1심형량은 징역 5년] 서울신문 2007.02.26, 9면</ref> 당시 재판절차는 지방법원-복심법원-고등법원의 3심제도로 운영됐으며, 유관순 열사의 판결문은 징역 3년을 선고한 경성복심법원의 판결문만 남아 있어 1심 형량은 설왕설래했었다. 유관순 여사와 1년 가까이 복역한 어윤희씨는 “유관순 열사가 6년형을 받았다.”고 말한 반면 조병옥 박사의 동생 조병호씨는 “부친(조인원)이 유관순 열사와 함께 7년형을 받았다.”고 회고하는 등 관련자들의 증언도 일치하지 않았다.<ref name="jungsun"/> [[2007년]] [[2월 26일]] 병천·동면계 형사사건부 발굴로 유관순의 1심 재판형량은 징역 5년으로 바로잡히게 됐다.<ref name="jungsun"/>
 
=== 토막살인 루머 논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