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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지= [[일제 강점기]] [[경성부]] 서대문 감옥
|사망일= {{사망일과 나이|1920|9|28|1902|12|16}}
|사망원인= 고문고문과 후유증가혹행위
|거주지= [[충청남도]] [[천안군]] [[병천면]]
|국적= {{국기나라|대한제국}}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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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후 ===
유관순이 사망한 이틀 뒤, 이 소식을 들은 [[이화학당]] 교장 프라이와 월터 선생은 형무소 당국에 유관순의 시체 인도를 요구하였으나 일제는거부당했다. 이를이에 거부하였다.이화학당의 [[서대문형무소]]는외국인 교직원들이 유관순의 옥중사망을 국제여론에 호소하겠다고 강력하게 항의하자, [[서대문형무소]]는 마지못해 월터 교장서리에게 시체를 인도하였다. [[1920년]] [[10월 14일]] [[정동교회]]에서 김종우 목사 주례로 장례식이 거행되고,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이후 그의 존재는 잊혀졌다. 유관순의 시신은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나 이태원 공동묘지가 일제의 군용기지로 전환됨에 따라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하던 중 잃어버렸다.
 
[[1945년]] 광복 후 [[충청남도]]와 [[천안군]]의 협력으로 병천면에 유관순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 건립되었다. 한편 [[1946년]]부터는 [[박인덕]], 신봉조 등 [[이화학당]] 출신 인사들에 의해 기념사업회가 조직되었다. 이 즈음, [[서대문형무소]]로부터 유관순의 인수한 이들이 석유상자 속에 든 유관순의 시체를 열어보니 토막으로 참살되었다는 소문 등이 퍼뜨려졌다. [[1962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단장(후일 건국훈장 국민장으로 개정)이 추서되었다. 시신을 잃어버려 [[1989년]] [[10월 12일]] 그의 고향 근처에 가묘인 초혼묘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