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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집안은 가난한 학자 집안으로 대부분 지방관으로서 지방관으로서 관인 생활을 마치는 경우가 많았다. 딱히 특출난 명문가라고 할 수 없었지만, 안록산(安祿山)의 난 이후의 정치 개혁에서 비교적 낮은 가계 출신에게도 기회가 열렸다. 10세에 가족들에게 벗어나 [[장안]](長安) 부근에서 교육을 받았다. [[정원]](貞元) 16년([[800년]]) 29세로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고, 32세에 황제 친시(親試)에 합격하였으며, 그 무렵에 지은 「[[장한가]](長恨歌)」는 장안의 자랑거리일 정도로 유명하다.
 
백거이의 지우였던 원진은 백거이의 문집 《백씨장경집》 서문에서, "계림의 상인이 (백거이의 글을) 저자에서 절실히 구하였고, 동국의 재상은 번번이 많은 돈을 내고 시 한 편을 바꾸었다"고 하여, 당시 백거이의 글이 [[신라]]에까지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거이는 [[810년]]에 [[당 헌종|당 헌종]]이 신라의 [[헌덕왕]](憲德王)에게 보내는 국서를 황제를 대신해 지었으며, [[821년]]에서 [[822년]] 사이에 신라에서 온 하정사 김충량(金忠良)이 귀국할 때 [[당 목종|목종]](穆宗)이 내린 제서도 그가 지었다.
35세에 주질현위(盩厔縣尉)가 된 것을 시작으로 한림학사(翰林学士), 좌습유(左拾遺)를 역임했다. 이 무렵 당시 사회나 정치에 대한 비판을 담은 「신악부」라 불리는 작품들을 많이 지었다. 관인으로서 그의 경력은 성공적이었지만, [[원화]](元和) 10년([[815년]]) 재상 무원형(武元衡)이 암살된 사건의 배후를 캐라는 상소를 올렸다가 월권행위라 하여 강주(江州, 지금의 강서 성江西省 구강 시九江市)의 사마(司馬)로 좌천당했다. 그 뒤 다시 중앙으로 복귀하라는 명이 내려지긴 했지만, 그 자신이 지방관을 자처하여 [[항저우]](杭州, [[822년]]부터 [[824년]]까지), [[쑤저우]](蘇州, [[825년]]부터 [[827년]]까지)의 자사(刺使)를 맡아 업적을 그 지역을 성공적으로 다스렸다. 특히 항저우에 재직하는 동안 [[시후]](西虎)에 건설한 백제는 아직까지 남아서 그의 애민정신을 엿볼 수 있다.
 
35세에 주질현위(盩厔縣尉)가 된 것을 시작으로 한림학사(翰林士), 좌습유(左拾遺)를 역임했다. 이 무렵 당시 사회나 정치에 대한 비판을 담은 「신악부」라 불리는 작품들을 많이 지었다. 관인으로서 그의 경력은 성공적이었지만, [[원화]](元和) 10년([[815년]]) 재상 무원형(武元衡)이 암살된 사건의 배후를 캐라는 상소를 올렸다가 월권행위라 하여 강주(江州, 지금의 강서 성江西省 구강 시九江市)의 사마(司馬)로 좌천당했다. 그 뒤 다시 중앙으로 복귀하라는 명이 내려지긴 했지만, 그 자신이 지방관을 자처하여 [[항저우]](杭州, [[822년]]부터 [[824년]]까지), [[쑤저우]](蘇州, [[825년]]부터 [[827년]]까지)의 자사(刺使)를 맡아 업적을 그 지역을 성공적으로 다스렸다. 특히 항저우에 재직하는 동안 [[시후]](西虎)에 건설한 백제는 아직까지 남아서 그의 애민정신을 엿볼 수 있다.
 
개성(開成) 원년([[836년]])에 형부시랑(刑部侍郞), 3년([[838년]])에는 태자소전(太子少傅)이 되었으며, [[당 무종|무종]](武宗) [[회창]](會昌) 2년([[842년]])에 형부상서(刑部尙書)를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때 그의 나이 71세였다. 74세에 자신의 글을 모아 《백씨문집(白氏文集)》(백씨장경집) 75권을 완성한 바로 이듬해 생애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