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평천: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7번째 줄:
 
== 명칭유래 ==
* [[포은]] 선생이 [[선죽교]]에서 [[이방원]]이 보낸 자객 [[조영규]]에게 피살된 뒤 경기도 [[풍덕군]]<ref>현재는 [[황해북도]] [[개풍군]]으로 북한(조선인민공화국)은 현 개풍군으로 1955년 장풍군, 판문군과 함께 개성직할시로 통합하다가 2003년 판문군을 폐지, 장풍군, 개풍군을 황해북도로[[황해북도]]로 편입하였다.</ref>에 일시 매장되었다가 뒤에 고향인 [[경상북도]] [[영천]]으로 천묘하고자 하였다. 그 면례 행렬이 옛 수지읍 풍덕리에 이르자 면례행렬 앞에 세웠던 명정이 바람에 날려 떨여졌다고 하는데 기록에는 삼남대로(三南大路)인 수원과 용인의 중간지점에 이르자 홀연히 명정이 떨어졌는데 지금의 묘소 자리인 [[모현면]] 능원리 문수산 하단이라 하고 뒷날 풍덕천(豐德川)이라 이름하였다.
 
* 남쪽으로 길을 떠나고자 하면 상여가 움직이지 않아 할 수 없이 명정이 떨어진 곳으로 가자는 뜻이라 하여 그쪽으로 발길을 돌리자 상여가 움직였고 그래서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용인과는 아무런 인연도 없는 이곳에 선생의 유택이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풍덕에서 오신다”라고 하여 풍덕래(豊德來)라고 한 것을 1914년 지명 표기 작업을 할 때 ‘올 래(來)’자를 ‘내 천(川)’자로 바꾸어 풍덕천(豊德川)이라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풍덕천이 물이 깊어 명주 한 필이 다 들어갔는데 [[임진왜란]]때 왜적이 풍덩풍덩 빠져죽어 풍덩내[川]라고 하던 것이 풍덕이 되었다는 일설도 존재한다.<ref>[http://yongin.grandculture.net/gc2/common/sub.jsp?pact=view_id&h_id=GC00900100 디지털용인문화대전 풍덕천]</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