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내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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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판 ==
{{인용문|`윤내현 학설'을 둘러싼 이런 격렬한 논쟁이 급기야 인신공격으로 비화하고 나아가 기존 강단사학계가 현재는 윤교수의 주장을 아예 묵살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그의 학설에는 한국 고대사학계가 그냥 묵살하기 어려운 대목이 너무 많다.
윤내현의 고조선 관련 연구 및 그의 대표적인 저서 《[[고조선 연구]]》는 [[북한]]의 [[역사학자]]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1963)를 표절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ref>이형구, 〈리지린과 윤내현의 '고조선 연구' 비교〉, 《역사학보》 146호, 1995 / 서영수, 〈요동군의 설치와 전개〉 p22, 《요동군과 현도군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08</ref> 윤내현은 《고조선 연구》를 펴내기 전인 1984년 학술세미나에서 자신의 논문과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가 유사하다는 지적이 있자 자신이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등 북한 자료를 미국의 대학도서관에서 입수했음을 시인하였으며, 85년 11월에는 "주(注)를 달면 자신의 학설이 무너진다"고 변명하며 연구비를 반납하고 자신의 글을 거두어 갔다.<ref>이형구, 〈리지린과 윤내현의 '고조선 연구' 비교〉, 《역사학보》 146호</ref>
 
이기백 당시 서강대 교수를 비롯해 이기동(동국대),노태돈(서울대) 교수 등 이른바 `강단사학계'를 이끌고 있는 학자들이 윤교수 비판을 주도했다.
 
반면 윤교수를 비판한 이들 학자들을 `강단사학자'라고 싸잡아 비난하고 있던 `재야사학자' 그룹에서는 윤교수를 지지하고 나섰다.
 
무엇보다 한국고대사 분야에서 윤교수 만큼 광범위하게 중국 문헌과 중국 고고학 성과를 두루 인용한 학자도,윤교수보다 많은 고대사 관련 저술들을 낸 학자도 남한에서는 거의 없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는 그만큼 윤교수가 나름대로 치밀한 문헌고증을 했으며 고고학 성과를 최대한 반영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물론 윤교수의 학설이 북한역사학자 리지린이 쓴 `고조선사'를 상당부분 인용하고 있고 이 때문에 기존 남한 학계에서는 "윤내현의 학설은 리지린을 베낀데 불과하다"고 비판하고 있기도 하다.
 
실제 리지린은 윤교수처럼 고조선 중심지를 난하 유역으로 보고 있으며 두 학자의 인용문헌과 인용대목이 대부분 겹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설사 윤교수가 일부 남한 학계 주장처럼 리지린의 연구성과를 대폭 수용했다고 해서 이것이 "윤교수 학설의 신뢰성을 떨어뜨리는 것은 아니며 북한에서 나온 한국 고대사 관련 연구업적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자세는 더욱 바람직하다"고 윤교수 지지자들은 반박하고 있다.
 
더구나 기존 남한학계가 윤교수 학설에 대한 공격의 주된 근거로 삼고 있는 `고조선 중심지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부지역이 아니며 이른바 한사군 또한 지금의 요서지방에 설치됐다'고 하는 주장은 윤교수나 리지린만의 독특한 학설이 아니라는 점도 남한 학계가 주목해야 눈여겨 보아야 할 대목이다.
 
고조선 중심지와 한사군이 만주에 있었다는 주장은 가깝게는 단재 신채호와 위당 정인보가 주장했던 것이며 조선후기 실학자 중 일부도 이런 학설을 폈다는 것은 기존 남한학계 통설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를 요구하는 대목이다. - 윤내현 학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연합뉴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4519504 윤내현 학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연합뉴스(1999.03.13) 기사내용</ref>)}}
 
윤내현의 고조선 관련 연구 및 그의 대표적인 저서 《[[고조선 연구]]》는 [[북한]]의 [[역사학자]]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1963)를 표절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받았다. <ref>이형구, 〈리지린과 윤내현의 '고조선 연구' 비교〉, 《역사학보》 146호, 1995 / 서영수, 〈요동군의 설치와 전개〉 p22, 《요동군과 현도군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08</ref> 윤내현은 《고조선 연구》를 펴내기 전인 1984년 학술세미나에서 자신의 논문과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가 유사하다는 지적이 있자 자신이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등 북한 자료를 미국의 대학도서관에서 입수했음을 시인하였으며, 85년[[1985년]] 11월에는[[11월]]에는 "주(注)를 달면 자신의 학설이 무너진다"고 변명하며해명하며 연구비를 반납하고 자신의 글을 거두어 갔다.<ref>이형구, 〈리지린과 윤내현의 '고조선 연구' 비교〉, 《역사학보》 146호</ref> 그러나 학자적 양심과는 무관한 일이며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한 것임을 밝히기도 하였다.<ref>「고조선의 강역」해석싸고 표절 논쟁 재연 경향신문 6면 생활/문화 기사(뉴스, 1986.04.23) 참조</ref>
 
한편으로 윤내현은 "나의 주장은 [[신채호]](申采浩) ・ [[정인보]](鄭寅普) ・ [[장도빈]](張道斌) 등 ‘민족사학자’들이 주장해왔던 기존 학설과 궤를 같이하고 있을 뿐 표절과는 거리가 먼 주장"이라고 입장을 표명했다. <ref>{{뉴스 인용|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6042300329206001&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86-04-23&officeId=00032&pageNo=6&printNo=12483&publishType=00020|제목=「古朝鮮(고조선)의 疆域(강역)」해석싸고 표절 論爭(논쟁) 재연|언어=한국어|이름=이용(李傭)기자|작성일자=1986-04-23|출판사=경향신문(네이버)|확인일자=2012-07-03}}</ref><ref>{{뉴스 인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1539985|제목="고구려 태동 현도군과 관계없어"|언어=한국어|이름=김태식 기자|작성일자=2007-02-06|출판사=연합뉴스(네이버)|확인일자=2012-07-03}}</ref><ref>{{뉴스 인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21&aid=0000166612|제목=오후여담, 역사 vs 역사|언어=한국어|이름=김성호/객원논설위원|작성일자=2006-10-04|출판사=문화일보(네이버)|확인일자=2012-07-03}}</ref> 또한 표절 시비가 이형구가 주도한 한국 주류 사학계의 모략이라는 주장도 있다. <ref>김상태 《엉터리 사학자 가짜 고대사 (식민사학과 동북공정을 둘러싼 주류 강단사학의 흑막)》표절 시비의 학살극과 사라진 영웅들 441~535쪽, 《책보세》, 2012년 6월 11일</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