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친왕"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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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명 실패 이후 ====
<br> [[파일:Sadonggung Ihwamun.png|thumb|200px|사동궁 오얏꽃 문장]]
[[1919년]] [[11월 20일]]자의 [[독립신문]] 기사에는 '의친왕의 친서', '의친왕 전하' 라는 말과 함께 "의친왕 전하께서 [[상해]]로 오시던 길에 안동에서 적에게 잡히셨도다. 전하 일생의 불우에 동정하고 전하의 애국적 용기를 칭송하던 국민은 전하를 적의 손에서 구하지 못함을 슬퍼하고 통분하리로다."라고 쓰여 있다.<ref name=autogenerated1>{{서적 인용|제목=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저자=서중석 지음 |출판사=역사비평사 | 연도=2006 |쪽=327}}</ref> 그해의 [[11월 25일]]자 《[[독립신문]]》 2면의 기사에는 의친왕의 상해행 기사로 대부분 할애되었으며 이후 그 뒤에도 상당 지면 할애되었다 한다.<ref name=autogenerated1 /> 이후 [[조선총독부]]는 일본 정부에 보고하여 의친왕에게 형식적으로 부여되었던 이강 공이라는 공족의 작위를 박탈당했으며, 그의 공위는 장남 [[이건 (1909년)|이건(李鍵公)]]에게 습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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