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레야슬라프 조약: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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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적 배경 ==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연방]]에 거주하는 [[러시아 정교]] 신자들은 폴란드 가톨릭으로부터 민족적, 종교적으로 억압받았다. 억압에 대항하는 저항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는 자연스럽게 저항 세력의 동맹으로 보였다. 처음으로 러시아에게 원조를 부탁한 것은 1591년부터 1593년에 폴란드 귀족에 대항하는 봉기를 지휘하던 등록 코사크군의 최고 사령관인 헤트만 크리슈토프 코신키였다. 그 후 헤트만 표트르 코나셰비치 '사하이다치니'(Petro Konashevych-Sahaidachny)가 표트르 아딘초프를 사신으로 보내 자포로지예 군대의 러시아 국적을 승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1622년에 이사이야 코핀스키 주교가 러시아 정부에게 우크라이나의 정교 신자들을 러시아 국민으로 승인할 것을 제안했다. 1624년에 대주교 이오브 보레츠키도 같은 요청을 했다.
 
1648년에 보흐단 흐멜니츠키(Bogdan Khmielnicky)의 지휘아래 대규모의 봉기가 발발했다. 평민과 농민으로 구성된 카자크가 일으킨 봉기는 주테 보디 전투 등 여러 전투에서 폴란드 군으로부터 계속된 승리를 얻었고, 바르샤바와 즈보로브 평화 조약을 맺어 카자크의 자치권을 허가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