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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월 잡지 《[[조광]]》에 산문 〈예술의 귀향 - 미술의 신체제(藝術의 歸鄕 - 美術의 新體制)〉를 발표하면서부터 문학과 언론 활동에 전념하는 한편 일제에 적극 협력하게 된다. 1941년 4월 전후에 자오선사(子午線社)에 입사했다. [[1942년]]부터 [[1943년]]까지 《조광》, 《[[동양지광]]》, 《[[문화조선]]》 등에 기고한 산문과 시를 통해 학병, 지원병, 징병을 선전, 선동하는 한편 일본의 침략 전쟁과 전사자를 찬양했다. 1942년 12월 3일 [[조선문인협회]]와 [[조선연극문화협회]], [[동양극장]]이 주최하고 [[국민총력조선연맹]]의 후원으로 열린 대동아 전쟁([[태평양 전쟁]]) 1주년 기념 국민시(國民詩) 낭독회에서 시를 낭독했으며 1943년 2월 3일 국민총력조선연맹 주최로 열린 예술 부문 관계자 연성회에 참석했다. 《동양지광》, 《문화조선》 등에 내선일체와 황민화 정책을 선전하는 내용을 담은 산문, 바람직한 총후봉공 자세를 선전하는 시와 산문을 기고했다.
 
[[1943년]] [[5월 30일]]부터 [[6월 4일]]까지 실시된 조선군보도반 연습훈련에 참가했으며 《국민문학》, 《문화조선》 등에 연습훈련 참가 소감과 결의를 담은 산문을 기고했다. [[1943년]] [[5월 27일]] [[조선문인보국회]] 주최로 열린 해군을 찬(讚)하는 시 낭독회에 참석한 자리에서 자작시 〈바다의 서설(海の序說)〉를 낭독했고 [[1943년]] [[6월 13일]] 조선문인보국회 시부회 간사로 선임되었다. 1943년 6월 15일부터 6월 20일까지 《문화조선(文化朝鮮)》 편집부 주최로 열린 〈연성(鍊成)하는 반도청년반도 청년(半島 靑年)〉 특집 사진전에서 시를 헌정하는 한편 내선(內鮮) 시 낭독 연구 좌담회(1943년 7월 12일 개최), 국민총력조선연맹 주최 미소기(禊) 연성회(1943년 8월 5일 개최) 등에 참석했다. 이러한 경력 때문에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문화/예술 부문과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1943년부터 1944년까지 잡지 《문화조선(文化朝鮮)》 촉탁기자(1943년 4월 전후 ~ 1944년 2월), 《농공지조선(農工之朝鮮)》 편집장(1944년 3월), 조선문인보국회 시부회 기관지 《국민시가(國民詩歌)》 편집위원(1944년 3월) 등을 역임했다. 광복 이후부터 1950년 3월 퇴직할 때까지 서울신문사, 경향신문사에서 근무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