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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송 (남조)|송나라]] 말기 소도성은 난릉(蘭陵) 출신의 하급병사로
[[482년]] 고제(高帝)는 즉위 3년 만에 죽고, 아들 [[제 무제|무제]](武帝)가 즉위했다. 제2대 황제 무제는 아들 경릉왕(竟陵王) 소자량(蕭子良)을 상류로 보내 송나라 [[효무제 (송)|효무제]]이래 실시했던 태사(台使) 파견을 중지했다. 태사는 조세대납 지역에 대해 중앙에서 그 감시를 위해 내려보내는 관리였으나 부정부패가 심했고, 명문출신의 지방관과 대립하여 악평이 많았다.
무제는 또한 교적관(校籍官)을 시켜 호적을 조사하고 정리하였다. 수년에 걸친 토지조사 및 호적조사로 부정부패 때문에 토지를 빼앗기고 국경 근처에서 떠돌던 많은 백성들이 호적에 복귀하였다. 무제는 중서사인 채법량, 여문도를 시작으로 한문 출신의 인재를 등용하여 귀족을 제압했다. 이로 인해 귀족의 지지는 잃어버렸으나, 치세 전반에 걸쳐 백성들의 삶은 윤택해지고, 도시가 번영하였다는 평이 전해졌다. 무제의 치세는 ''영명의 치(永明의 治)''라 불리며 11년간 계속된 뒤
명제는 남조 특유의 전제군주로 아들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고제, 무제의 아들 20여명을 살해했다. 또한 종실제왕이 파견나간 곳에 주사(主師)를 파견하여 때때로 입조시켜 주의 상황을 보고하게 했다. 그때문에 [여러 주의 일은 주사에게 듣고, 자사에게는 듣지 않는다]라는 평을 받으며, 귀족, 관인들의 지지는 사라졌다.
제6대 황제 [[폐제]](廢帝) 소보권
당시 제나라 문화의 중심은 무제의 둘째 아들 경릉왕(竟陵王) [[소자량]](蕭子良)의 저택이었다. 그의 저택에 있던 서쪽처소는 당대 최고의 문인들이 모였기에 이들 대표적인 8명을 가리켜 [[경릉8우]](竟陵八友)라고 불렀다. 소연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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