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하워드 마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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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하워드 마샬마셜'''(James Howard Marshall II, [[1905년]] [[1월 24일]] - [[1995년]] [[8월 4일]])은 [[미국]]의 기업인, 대학 교수이자 변호사로 [[미국]]의 석유 재벌이자, 재계 거물의 한 사람이었다. 한때 [[미국]] [[연방 정부]]의 공무원으로도 근무하였다. [[유류 파동]] 이전까지는 미국 국내외의 9개 이상의 석유회사에도 관계하였다. [[1994년]] 모델 [[애나 니콜 스미스]]와 결혼하였으나 1년 만에 사망하였다.
 
== 생애 ==
=== 초기 활동 ===
제임스 하워드 마샬은마셜은 [[펜실베이니아 주]] 저먼 타운에서 태어났다. 그는 [[펜실베이니아 주]] 뉴타운의 사립고등학교 [[조지 고등학교]]를 다녔으며, 졸업 후 [[퀘이커]]교 계열 2년제 대학인 [[하버포드 대학]](Haverford College)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1926년]]에 졸업하였다. 조지 고등학교와 하버포드 대학에 재학 중 그는 대학 학보와 교내 토론클럽을 지휘하였으며 미식축구팀과 테니스부서에도 참여하여 활동했다.
 
[[1926년]] [[하버포드 대학]]을 졸업하고 [[예일 대학교]]에 편입하였으며, [[예일 대학교]]를 졸업한 후 [[예일 대학교]] [[로스쿨]]에 들어가 [[1931년]]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예일대학교 로스쿨을 마친 뒤 1931년부터 예일대 로스쿨의 학교 보조원으로 1933년까지 근무했다. 1933년 해롤드 L. 랙스의 법률 자문위원이 되었다. 1933년에는 석유산업에 대한 경쟁 코드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그는 [[1931년]] [[엘리노어 피어스]](Eleanor Pierce)와 결혼했으나, [[1961년]] 이혼했다. 엘리노어 피어스 사이에서 [[제임스 하워드 마샬 3세]](1936년 2월 6일생)와 [[에버렛 피어스 마샬]](1939년 1월 12일생)의 두 아들이 태어났다. 바로 [[1961년]] 베티 보하넌(Bettye Bohannon)과 재혼했는데, 두 번째 재혼생활은 베티 보하넌이 사망하는 [[1991년]]까지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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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후 ===
그는 구두로는 [[안나 니콜 스미스]]에게 자신의 재산의 반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하나 유언장에는 [[안나 니콜 스미스]]의 이름은 없었다. 그가 죽고 [[안나 니콜 스미스]]는 하워드 마샬의마셜의 상속인인 [[피어스 마샬]]과 12년간 법정 소송을 하였다.
 
하워드 마샬은마셜은 유언장에서 유산 상속자로 [[안나 니콜 스미스]]와 자신의 다른 아들 [[제임스 하워드 마샬 3세]], 그밖의 자녀들은 없었고, 자신의 사업 동반자이자 후계자로 지목한 [[에버렛 피어스 마샬]]을 지목했다. [[안나 니콜 스미스]]와 다른 아들 [[제임스 하워드 마샬 3세]]는 유산을 획득하기 위해 [[미국]] 내 모든 주의 법원과 [[미국 연방 법원]]에서 소송을 걸었지만 [[텍사스 법원]]에서 패소한다.
 
유언장 검증 절차에 들어가는 동안 [[안나 니콜 스미스]]는 파산 선언을 함과 동시에 4억 7400만 달러의 유산을 받았다. 그러나 파산 선고가 무효가 되면서 [[안나 니콜 스미스]]의 상속분은 8천 800만 달러가 감소된다. 9차례의 재소송 끝에 [[안나 니콜 스미스]]는 제임스 하워드 마샬의마셜의 상속인이 아님을 확인하였지만 분쟁은 계속 되었고, [[2006년]] 그의 아들 [[에버렛 피어스 마샬]]이 사망한 뒤에도 계속되었다. [[에버렛 피어스 마샬]]의 가족은 다시 소송을 제기했지만 피어스의 몫으로 3500만 달러의 유산이 감액 지급되었다.
 
== 관련 항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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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1995년 죽음]]
[[분류:미국의 기업인]]
[[분류:미국의 퀘이커교도]]
[[분류:미국의 변호사]]
[[분류:미국의 법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