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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일'''(李炳逸, [[1910년]] [[6월 6일]] ~ [[1978년]])은 [[한국]]의 [[영화 감독]]이다.
 
[[함경남도]] [[함흥시|함흥]] 출신으로 [[일본]]에 유학하여 영화를 공부했다.
 
감독 데뷔작으로 [[1941년]] 친일 영화 〈반도의 봄을 연출했다. 영화 속에서 영화 춘향전 제작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이 영화는 이병일이 설립한 [[명보영화사]]가 제작까지 맡았으며, 친일색이 있으나 노골적인 친일 영화는 아니다<ref>{{뉴스 인용
|저자=강성률
|제목=일제말기 영화, [이렇게 친일로 나갔다
|url=http://www.culturenews.net/read.asp?title_up_code=603&title_down_code=005&article_num=5556 일제말기 영화, 이렇게 친일로 나갔다] 《
|출판사=컬처뉴스》 (2006.3.14)</ref>.
|작성일자=2006-03-14
|확인일자=2007-10-21
}}</ref>.
 
광복 직후인 [[1945년]] [[8월 18일]]에 결성된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와,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가 같은 달 말에 개편해 조직된 [[조선문화건설본부]]에 참가했다. 1945년 12월 [[조선프로레타리아영화동맹]]과의 통합으로 [[조선영화동맹]]이 발족했을 때는 중앙집행위원을 맡았다. 그러나 조선영화동맹에서 [[좌익]] 계열 영화인들이 주도권을 잡으면서 [[안석주]]를 중심으로 [[우익]] 영화인들이 이탈하여 이듬해 3월에 친목 모임을 표방하는 [[영화감독구락부]]가 결성되었고, 이병일도 이 단체에 참여했다.
광복 후 [[미국]]에 영화 유학을 한 뒤 귀국하여 [[1956년]] 연출한 〈[[시집가는 날]]〉이 [[1957년]] 제7회 [[베를린 영화제]]에 진출, 한국영화 사상 최초로 국제영화제에 출품되는 기록을 남겼다<ref>《스포츠조선》 (2007.5.28) [http://spn.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5/28/2007052800175.html 3대 영화제, 한국영화 역대 수상작은?]</ref>. 〈시집가는 날〉은 연극 〈맹진사댁 경사〉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같은 해 [[아시아영화제]]에서 특별희극상을 수상했다.
 
[[1946년]] 이병일이 《[[영화시대]]》에 기고한 글 〈전향기 조선영화의 진로〉를 보면, 문학계의 영화 매체에 대한 한계 지적을 반박하면서 예술의 독립성과 "조선색"을 강조하여 한국적인 영화 제작만이 한국 영화 발전의 길임을 주장하고 있다<ref>{{서적 인용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파 목록]] 영화 부문에 포함되었다.
|저자=편집부
|제목=한국현대 예술사대계 1 (해방과 분단 고착 시기)
|발행일자=1999-12-22
|출판사=시공사
|출판위치=서울
|id=ISBN 895270522X
|페이지=206쪽
}}</ref>.
 
[[미국]]에 영화 유학을 한 뒤 귀국하여 [[1956년]] 연출한 《[[시집가는 날]]》이 이듬해 열린 제7회 [[베를린 영화제]]에 진출, 한국영화 사상 최초로 국제영화제에 출품되는 기록을 남겼다<ref>{{뉴스 인용
|제목=3대 영화제, 한국영화 역대 수상작은?
|url=http://spn.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5/28/2007052800175.html
|출판사=스포츠조선
|작성일자=2007-05-28
|확인일자=2007-10-21
}}</ref>. 《시집가는 날》은 [[오영진]] 원작의 연극 《맹진사댁 경사》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욕심 많은 맹진사의 신부 바꿔치기라는 한국적인 소재를 해학적으로 풀어내면서 금전적 가치에 대한 부정, 또는 대안적 가치를 제시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ref>{{서적 인용
|저자=편집부
|제목=한국현대 예술사대계 2 (1950년대)
|발행일자=1999-12-22
|출판사=시공사
|출판위치=서울
|id=ISBN 8952710274
|페이지=214쪽
}}</ref>. 이 영화는 같은 해 [[아시아영화제]]에서 특별희극상을 수상했다.
 
이후 《청춘일기》(1959), 《서울로 가는 길》(1962), 《귀국선》(1963), 《공작부인》(1964)을 연출했으며,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제작자로 더 활발한 활동을 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에 참가한 행적 등으로 인해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1차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1차 명단]] 영화 부문에 포함되었다.
 
동생 [[이성구]]도 영화 감독이다<ref>《씨네21》 (2004.3.3) [http://www.cine21.com/Culture/culture_view.php?mm=003001001&mag_id=23308 1960년대판 자유부인, <댁의 부인은 어떠십니까>]</ref>.
 
== 참고자료 ==
* {{KMDb 사람|00004650|이병일}}
*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http://www.kmdb.or.kr/actor/mm_basic.asp?person_id=00004650 이병일]
* {{뉴스 인용
* 김소영,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2672297 삶과문화/ 한국영상자료원의 봄날] 《중앙일보》(2007.3.23)
|저자=김소영
|제목=삶과문화/ 한국영상자료원의 봄날
|url=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2672297
|출판사=중앙일보
|작성일자=2007-03-23
|확인일자=2007-10-21
}}
* 김종원, [http://www.chpri.org/board/content.asp?bCode=4394&page=&sColumn=&sText= 문화재 등록 대상 영화의 해설],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2007.5.9)
* {{서적 인용
|저자=편집부
|제목=한국현대 예술사대계 1 (해방과 분단 고착 시기)
|발행일자=1999-12-22
|출판사=시공사
|출판위치=서울
|id=ISBN 895270522X
|페이지=194~198쪽
}}
 
== 주석 ==
<references/>
 
[[분류:1910년 태어남]]
{{토막글|영화}}
[[분류:1978년 죽음]]
{{토막글|한국 사람}}
 
[[분류:한국의 영화 감독]]
[[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