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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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직후인 [[1945년]] [[8월 18일]]에 결성된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영화부문과,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가이 단체에 참가한 영화인들이 같은 달 말에 개편해 조직된조직한 [[조선문화건설본부]]에 참가했다. 1945년 12월 [[조선프로레타리아영화동맹]]과의 통합으로 [[조선영화동맹]]이 발족했을 때는 중앙집행위원을 맡았다. 그러나 조선영화동맹에서 [[좌익]] 계열 영화인들이 주도권을 잡으면서 [[안석주]]를 중심으로 [[우익]] 영화인들이 이탈하여 이듬해 3월에 친목 모임을 표방하는 [[영화감독구락부]]가 결성되었고, 이병일도 이 단체에 참여했다.
 
[[1946년]] 이병일이 《[[영화시대]]》에 기고한 글 〈전향기 조선영화의 진로〉를 보면, 문학계의 영화 매체에 대한 한계 지적을 반박하면서 예술의 독립성과 "조선색"을 강조하여 한국적인 영화 제작만이 한국 영화 발전의 길임을 주장하고 있다<ref>{{서적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