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안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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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안 사건 발생이후 3개월간 중국내 정세는 180도 선회하게 되었다.
 
장쉐량은 난징에서 총통에게 스스로 처벌을 요청하였고 [[12월 31일]] 군사법정에서 10년 금고형과 5년간의 공민권 박탈을 선고 받았으나 다음날로 장제스의 사면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그 이후 다시는 동북군이나 어떠한 군사권도 갖지 못했고 사실상 장제스의 포로로 1950년 장제스가 타이완으로 도주할 때도 데려갔으며 대만에서도타이완에서도 오랫동안 가택연금 상태로 있었으며 시안 사건에 대해 발언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장제스는 반란을 막지 못한 무능을 탓하며 사의를 표명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는 사실상 정치적 연극에 불과했다.) 이후 국민당 정권내 대대적인 '[[친일파]]'관료들의 숙청이 이루어졌고 그 자리는 '구미파(歐美派)'로 채워졌다. 이어 열린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 형식적으로 반란군의 8개항을 거부했으나 국가의 당면한 최대의 문제는 "공산당 축출과 통일"이 아니라 "실지회복"임을 결의했다. 또한 장제스가 오랫동안 연기해온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할 것을 결의하고 조속히 민주제도를 도입할 것을 결의했다. 또한 정치적 발언과 언론의 자유를 선포하고 정치범을 석방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