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산 제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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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들 [[샤푸르 1세]]는 영역을 더욱 넓혔다. 여러번 [[로마 제국|로마]]군과 싸워 로마 황제 [[고르디아누스 3세]](238년 ~ 244년)는 전사시켰고, 황제 [[발레리아누스]](253년 ~ 260년)를 포로로 잡을 정도로 샤푸르는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래서 그는 '이란족과 비(非)이란족의 왕 중 왕'이란 칭호를 사용했으며, 이 칭호는 사산 왕조 말기까지 지속되었다. 사산 왕조의 영역은 [[파르티아]] 때보다 훨씬 광대했는데, 이것은 그 행정력이 효율적이었고 군사력이 막강했음을 뜻한다. [[중앙 아시아]] 쪽의 동북부 국경지역에서 [[아르다시르 1세]]와 [[샤푸르 1세]]는 [[쿠샨 왕조]]의 서부지역을 정복했다. 이후 사산 왕조의 외교정책은 변방의 방어와 영토확장에 목적을 두고 추진되었다.
 
사산 왕조는 [[파르티아 왕조]]의 세습적인 자치왕국을 폐지하고, 대신 왕족 가운데서 [[총독]]을 임명 또는 해임했다. 따라서 왕위계승자는 보통 가장 큰 주의 총독직을 맡게 되었으며, 그 결과 중앙집권이 매우 강화되었다. 더구나 황제 개인에게보다 왕실에 대한 충성심이 강조되어서 왕실의 집단지도제와 유사하게 되었다. 사산 왕조시대 로마와의 분쟁이 가장 첨예했던 곳은 [[아르메니아 인페리오르]]였다. [[바흐람 2세]]의 사후(293년) 왕위 계승 문제로 내분이 일어나 아르메니아는 296년에 로마의 수중에 떨어졌다. 아르메니아와 로마에서 크리스트교화가기독교화가 진행되자 이것은 이란과 로마-비잔티움 사이의 종교적 분쟁으로 확대되었다.
 
[[샤푸르 2세]]의 아르메니아 실지회복(失地回復) 노력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으나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2세]] 사후(361), 티그리스 강변과 아르메니아 대부분의 영토는 페르시아의 영토가 되었다. 약 20년간의 혼란기([[아르다시르 2세]], [[샤푸르 3세]], [[바흐람 4세]])가 지난 후 [[야즈데게르드 1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기독교]]에 관대한 정책을 폈는데 이것으로 인해 귀족들의 원성을 샀으며, 이때문에 그의 사후(420) 아들 [[바흐람 4세]]의 계승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는 동부에 [[에프탈]]의 침입 때문에 [[동로마 제국]]과 100년간의 평화조약을 맺고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허용했다. [[카바드 1세]](488~531)는 정통 조로아스터교를 재정립했으며, 과세제도의 신설과 토지세의 개혁 등을 이룬 명망 있는 통치자가 되었다. 또한 군대를 강화하여 그의 세력은 [[흑해]]까지 다다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