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둔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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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제대로 읽어보기나 하셨는지요. 「백산학보」 61집에 기고한 논문<'임둔태수장'(臨屯太守章) 봉니를 통해 본 한사군의 위치>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1&aid=000015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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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치에 대한 논란 ==
임둔군의 위치와 영역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지만있고 현재 대한민국의 역사학계에서는 임둔군의 위치를 함경남도 남부와 강원도 북부 일대로 비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비정하였다.<ref name="임둔군"/>
 
하지만 최근 기원전 108년 한(漢)나라가 위만조선을 무너뜨리고 그곳에 설치했다는 낙랑.임둔.현도.진번의 이른바 한사군(漢四郡) 가운데 '臨屯(임둔)'이라는 글자가 적힌 봉니(封泥) 유물이 중국 요서 지역에서 출토됐다.
 
이는 한사군이 설치됐던 장소, 즉 위만조선의 통치강역이 평양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북부 및 만주 요동지역 일부이며 이 중에서도 임둔군은 한반도 북부에 자리잡았다는 학계 통설을 전면 재검토하게 하고 있다.
 
중국 지린대(吉林大)에서 중국 요서지역 청동기시대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복기대 단국대박물관 연구원은 최근 발간된 학술지 「백산학보」 61집에 기고한 논문 < '임둔태수장'(臨屯太守章) 봉니를 통해 본 한사군의 위치 >에서 문제의 봉니 출토 사실을 소개했다.
 
봉니란 고대 중국이나 메소포타미아 등지에서 공문서 등을 봉할 때 사용한 진흙덩이로, 예외없이 직인이 찍혀 있다.
 
이 논문에 따르면 '임둔태수장'이라는 글씨가 전서체로 음각된 봉니는 중국 랴오닝성(遼寧省)의 해안도시인 진시시(錦西市) 소황띠(小荒地)라는 고대 성곽에서 지난 93-94년 지린대박물관과 랴오닝성 고고문물연구소 조사팀에 의해 발행됐다.
 
해안에서 30㎞ 남짓 내륙으로 들어간 곳에 자리잡은 이 유적에서는 기원전 20세기까지 올라가는 하가점(夏家店) 상층문화를 비롯해 후대의 요나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크게 4개로 구분되는 문화층이 인됐다.
 
이 중 '임둔태수장' 봉니(3 x 3㎝)는 중심 연대가 서한(西漢)인 제3문화층에서 '丞'(승)이라는 글씨가 적힌 또 다른 봉니 등과 함께 출토됐다.
 
'임둔' 봉니는 문헌이나 다른 지역 출토 봉니 연구성과를 검토할 때 규격과 서체, 문장 등이 서한의 규정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한나라) 중앙에서 임둔군 태수(군 우두머리)에게 보낸 것이 확실하다고 논문은 말했다.
 
따라서 이 봉니가 발견된 곳이 한사군 중에서도 임둔군에 속했을 가능성이 매우 커졌다고 복기대씨는 평가했다.
 
한국상고사 최대 논쟁거리였던 한사군 위치 문제는 단재 신채호와 위당 정인보로 대표되는 만주설과 제국주의시대 일본 학계 및 해방 이후 남한.일본학계의 평양 중심설이 팽팽히 맞서다가 최근에는 적어도 강단사학계만큼은 평양 중심설로 완전히 굳어진 형국이었다.
 
이런 흐름과 함께 학계 일부에서는 한사군 중에서도 낙랑군과 현도군을 제외한 임둔군과 진번군의 경우 존속 시기가 대단히 짧고 그 흔적이 기록이나 고고학적 유물로도 뚜렷이 확인되지 않는 점을 근거로 '가상의 군(郡)'이라는 주장까지 대두되고 있다.
하지만 이번 '임둔' 봉니 출토로 적어도 임둔군이 실재하지 않았다는 학설은 결정적인 타격을 받게 됐으며, 임둔을 비롯한 한사군의 위치 문제 또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논문은 덧붙였다.
 
임둔군은 사마천의 「사기」와 반고의 「한서」 등 기록에 따르면 한 무제 건봉(建封) 4년(기원전 108)에 설치됐다가 20여년만인 기원전 85년에 폐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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