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 (당나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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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는 일찍부터 문학에 재능을 보여, 14세에 여러 편의 악부(楽府)를 지어 이름을 떨쳤으며, 17세 때 당시 문단의 지도자적인 존재였던 [[한유]](韓愈)로부터 격찬받아 그의 비호를 받게 되었다. 810년에 진사(進士)가 되고자 장안으로 가서 과거에 응시했지만, 아버지의 휘였던 「진(晋)」과 진사의 「진(進)」이 같은 발음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시험을 거부당한다(스승 한유가 나서서 『휘를 변명하다』라는 글을 지어 반박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이때의 지식인들에게는 진사로 나아가 과거 시험을 거쳐 관료가 되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었고, 그 길이 막혀버린 이하는 실의에 빠져 장안을 떠나 창곡(昌谷)으로 돌아왔다가 이듬해 종9품상 봉례랑(奉礼郎) 관직을 얻어 다시 장안으로 오게 되지만(봉례랑 직책도 황실 혈연자에게 주는 것이 통례였다), 제례 때에 석차를 맡아보는 말석에 불과했던 봉례랑 직책이 성에 차지 못했던 이하는 813년 봄에 「봉례는 관직도 낮으니 더 무엇이 있는가」라는 시를 남기고 관직을 사임한 채 귀향해버렸다. 이듬해 따로 관직을 구하고자 친구 장철(張徹)을 의지해 노주(潞州, 지금의 산서 성山西省 장치 현長治県)으로 향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창곡으로 돌아와, 817년 갑작스레 병을 얻어 어머니 곁에서 숨을 거둔다. 향년 27세였다.
 
== 인물 · 일화 ==
* 만당(晩唐)의 시인으로 이하소전(李賀小傳)을 지은 [[이상은]](李商隠)은 이하의 용모에 대해 「체구가 말랐고, 가늘고 짙은 눈썹이 좌우로 이어졌으며 손톱이 이상하게 길었다」고 묘사하였다. 또한 원만하지 못한 성격으로 종종 타인으로부터 공격받고, 배척당했다(과거를 보지 못한 것도 이 성격이 원인이었다).
* 한유와 마찬가지로 문단의 대가로서 재상을 맡고 있던 원진(元稹)과도 알력이 있었다는 것을 전하는 일화도 있지만 연대가 맞지 않는다.
* 《이하소전》은 또, 어느 날 낮에 천상에서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 붉은 용을 타고 내려와, "상제(上帝)가 백옥루를 완성하고, 지금 그대를 불러다가 기문(記文)을 짓도록 명하였다."고 말하고 데려갔는데, 그날이 이하가 숨을 거둔 날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 시의 특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