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산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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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정보|
|분쟁= 애산 전투
|전체= 송-원 전쟁
|그림=
|설명=
|날짜= 1279년 3월 19일
|장소= 애산([[광둥 성]] [[장먼 시]] 신후이 구)
|장소= 광동성 애문
|결과= 원의 승리와 남송의 멸망.
|이유=
|교전국1=[[남송]]
|교전국2=[[원나라]]
|지휘관1=[[장세걸]]([[:zh:張世傑|zh]])
|지휘관2=[[장홍범 (1238년)|장홍범]]([[:zh:張弘範|zh]])<br/>이항([[:zh:李恒 (元朝)|zh]])
|지휘관2=[[포수경]]
|병력1=20020,000명 및 전선 1,000척50척
|병력2=20200,000명 및 전선 50척1,000척
|피해1=전군 괴멸, 잔존자 소수
|피해1=알 수 없으나 상당한 피해를 입었음.
|피해2=알 수 없음
}}
 
'''애산 전투''' 또는 '''애산 해전'''({{zh|t=厓山|s=崖山海战}})는 [[1279년]] [[3월 19일]] 중국 남부 광주(廣州)의 애산에서 벌어진 [[원나라]]와 [[남송]]의 최후 결전이다. 원나라의 군대가 10배 넘는 병력인 남송의 해군을 격파한 전투로전투에서전투로 남송은 패배하고,완전히 위왕(衛王)은멸망했다. 재상한자 [[육수부]](陸秀夫)와문화권 함께외에서는 물에현대의 뛰어들어지명을 사실상 남송은'''야먼 멸망했다전투'''({{zh|t=厓門戰役|s=崖门战役}})로 더 알려져 있다.
 
== 개요 ==
[[쿠빌라이]]의 원나라는 [[1276년]] 남송의 수도 [[임안]]을 함락시키고, 남송 황제함락시켰고 [[남송 공제|공제공종]](恭帝)을 항복시켰다항복하였다. 이로써 남송은 사실상 멸망했다. 그러나 육수부, [[문천상]](文天祥), [[장세걸]](張世傑) 및 [[진의중]](陳宜中) 등 일부 남송의 유신들은 임안 함락과 동시에 남송의공종의 황자을서형 황제로조하를 황제(단종)로 추대하고 원나라에 대한 저항운동을 계속했다. 원나라 군대는 이들을 격파하는 한편, [[취안저우 시|천주]](泉州)의 실력자로 해상교역으로 부를 축적한 [[포수경]](蒲壽庚)을 포섭하여 화남지역을 지배하에 두게 되었다.
 
서서히 강남에서 [[광둥 성]]으로 밀려난 옛 남송군은 병사한 단종의 후임으로 동생인 조병을 황제로 옹립하니 이가 [[남송 소제]]이다. 이후 선단으로 해상을 표류하던 중,떠돌며 저항을 계속하여 현재의 홍콩 주변에 있던 애산이란 당시 아무것도 없던 섬에 요새와 행궁(行宮)을 구축하고 철저항전의 의지를 보였다. 한편 원나라군은 포수경으로부터 선박 및 숙련된 수부(水夫)을선원을 제공받게 되어, 약했던 해상에서도 남송군과 남송함대을대등한 추적해전투 전투를능력을 유리하게가지게 진행시킬 수 있었다되었다.
 
원나라측의 기록에 의하면 옛 남송함대는 1,000척의 대형 선박을 모두 한데 묶어서 화재방지용으로화공 선체외장에대책으로 선체 외장에 진흙을 칠하고 적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긴 목재을목재를 묶어서 붙여놓아 방어망을 만들어 기름을 이용해 화공을 가하려는 의도를 가진 원나라군을 물리쳤다.
 
그러나 [[1279년]] 2월에 이르러, 기나긴 소모전에 피로가 쌓인 옛 남송군은 패주했다. 이것에 절망한 신하 및 간부들이 차례로 물에 뛰어들었고, 그 와중에 육수부는 어린 황제에게 [[대학]]의 강의를 배안에서 하였다. 그러나 [[2월 6일]] 저녁쯤 패배를 깨닫고, 황제을소제를 업고 안고 물에 뛰어들었다. 이것을 기점으로 전투는 종결되었고, 원나라군의 승리가 확정되었다.
 
== 그 후 ==
육상에서 저항운동을 벌이던 [[문천상]]은 이 전투 이전인 [[1278년]]에 원나라의 포로가 되어 대도(지금의 [[베이징]])으로 압송되었다. 원나라 왕조는 뛰어난 문인이던 그를 등용하기 위해 설득을 여러번 했으나, 그는 완강하게 거부하고 옥중에서 [[정기의 노래]]를 읊었고, [[1282년]]에 처형되었다. 이로써 원나라는 중국통일을 완수하였다.
 
 
[[분류:127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