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 (1476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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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2년 [[4월]] 경연특진관을 겸하고 [[8월]] [[의정부]]우찬성이 되었다. [[9월]] 지경연사로 경연에 입시하여 학문에 힘쓸 것과 관리 임용에 대한 대신들의 책임을 강조하였다.<ref name="gwan">중종실록 99권, 중종 37년(1542 임인 / 명 가정(嘉靖) 21년) 9월 24일(신미) 1번째기사 "이기가 학문에 힘쓸 것과 관리 임용에 대신의 책임을 아뢰다"</ref>
 
{{인용문|[[ (춘추, 晉)|진]](晉)나라가 중국의 법도를 궤란시켰기 때문에 그 국명(國命)을 직서(直書)하여 오랑캐로 여겼습니다. 이로써 신의를 도타이하고 의리를 밝히는 것이 중국의 법도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전한 문제|한 문제]](漢文帝) 때 [[시무|진무]](陳武) 등이 용병(用兵)할 것을 의논했었지만 문제는 그럴 생각이 없다고 하였는데, 이는 문제의 천성이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어느 정도 학문의 공력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전한 무제|한 무제]](漢武帝)는 의욕이 너무 많아서 용병을 끝까지 하여 가면서 큰 공 세우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왕회(王恢)와 한안국(韓安國) 등의 흉노를 치는 데 대한 편부(便否)의 의논을 분변하여 따를 수가 없었는데, 이는 학문의 공력은 전혀 없이 심기(心氣)만 왕성하여 한때의 통쾌함만을 취하려 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두 임금의 일은, 위에서도 마땅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무공(武功)을 이루기 위해 많은 살인을 저지르게 되면 반드시 보응이 있는 것인데, 무제에게 끝내 [[여태자|태자 거]](太子據) 의 화가 있었던 것을 살펴보면 천도(天道)는 되돌려 주기를 좋아하는 이치를 조금도 차질이 없이 이행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고(巫蠱)의 변이 일어났을 적에 무제에게 조금이라도 학문이 있었더라면 그것이 무고(誣告)임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지혜가 밝지 못했기 때문에 끝내 망사대(望思臺)를 쌓는 후회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천하를 다스리는 요점은 모두 진강(進講)하는 책 속에 들어 있습니다. 모름지기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에 공력을 기울여 학문의 방도를 극진히 한다면 일의 시비를 환히 알 수 있는 것인데 의심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문제와 무제는 학문의 유무가 같지 않았고 따라서 한 일도 서로 크게 달랐습니다. 마땅히 이 두 임금의 일을 가지고 지금 세상을 헤아리기를 ‘방금의 일이 문제 같은가, 아니면 무제 같은가?’ 하면서 늘 유념한다면 이는 반드시 경연(經筵)의 공인 것입니다.<ref name="gwan"/>}}
 
[[조선 중종|중종]]은 이기의 경력과 능력을 따져 능히 판서가 될만 하다고 보고 이기를 병조판서에 임명하려 했는데, 이조판서 [[유관]](柳灌)이 '탐관오리의 사위인데 어찌 재상직에 앉히느냐'하며 극력 반대하고 나서자 [[사헌부]]와 [[사간원]] 등도 들고 일어나 그의 판서직 임명을 반대하였다. 결국 이기는 한참 뒤에야 그의 능력을 높이 산 [[중종]]의 의중과 [[이언적]]의 천거로 형조판서에 오를 수 있었다.
 
==== 여진 토벌과 왜구 토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