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조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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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경희의 옥사 ====
{{참고|신경희의 옥사}}
[[1610년]](광해군 2)에 영돈녕부사 서평부원군으로 사후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청주 한씨]] [[한준겸]]의 딸과 가례를 올렸다. 1년 연상인 한씨([[인렬왕후]])는 1594년(선조 27) 7월 1일 원주 읍내 사제에서 태어났다. 인조보다 한 살 위인 한씨는 가례를 행하고 청성현부인(淸城縣夫人)에 봉하여졌는데, 선조가 일찍이 왕자 부인으로 뽑았다가 낙방하였으나 관상을 보고 귀하게 될 것을 안 [[선조]]가 그대로 다시 능양군을 위하여 배필로 간택하였다고 한다. 한씨와 가례를 올린 뒤 경행방 향교동 사저로 분가하고 [[1612년]](광해군 4) 18세 때 장자인 소현세자를 낳았다.
 
[[1615년]](광해군 7) '[[신경희의 옥사]]'가 일어나자 둘째 아우인 [[능창군]]이 죽임을 당하였다. 능창군은 일찍이 [[인빈 김씨]] 소생 왕자들 중 [[선조]]의 총애를 받아 세자 물망에 올랐던 [[신성군]]이 일찍 죽자 [[정원군]]에 의해 그의 양자로 들어갔었는데, 당시 17살이던 [[능창군]]은 [[수안]][[군수]] [[신경희]] 등이 획책하는 모반에 추대되었다 하여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이 무렵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성하다, 인빈의 묘자리가 좋다, 정원군의 집터가 좋다 등의 소문이 돌았고, 광해군은 이를 [[신경희의 옥사]] 직후 능창군이 사전에 왕위에 뜻을 두었다는 것으로 해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