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왕흥사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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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건 ==
[[577년]]에 [[백제 위덕왕]]이 자신의 죽은 왕자를 위하여 절을 창건하였다. 《[[삼국사기]]》에는 [[600년]] 봄 정월에 창건하고, 30명이 승려가 되는 것을 허가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ref>[二年 春正月 創王興寺 度僧三十人, 《[[삼국사기]]》백제본기 제5(권27)]</ref> 그러나 [[2007년]] [[10월 10일]] 왕흥사지 터에서 발견된 사리함 몸통에 한자 '丁酉年二月 十五日百濟 王昌爲亡王 子爲刹本舍 利李枚葬時 神化爲三'<ref>정유년 2월15일 백제왕 [[백제 위덕왕|창]](昌)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두 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ref>라는 글이 음각되어 있는 것이 밝혀져, 실제 창건 연도가 삼국사기 기록보다 23년 앞선 것으로 확인되었다.
 
== 소실 ==
삼국사기에 [[660년]] 11월 5일에 [[신라]]의 [[태종 무열왕]]이 "계탄(灘, 부여강)을 건너 왕흥사잠성(王興寺岑城)을 공격하였고, 7일에 이겨 700명을 목베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ref>[五日 王行渡灘 攻王興寺岑城 七日乃克 斬首七百人, 《[[삼국사기]]》신라본기 제5(권5)]</ref> 이후 절터는 폐허가 되었다.
 
== 발굴 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