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서 (1383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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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2년]] [[조선 단종|단종]]이 즉위하자 선왕인 문종의 유명을 받들어 [[좌의정]]으로서 [[황보인]]·[[정분]] 등과 함께 [[단종]]을 보필하는 데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정권을 장악하여 왕위를 획책하려는 야망을 품던 [[조선 세조|수양대군]]이 [[계유정난]] 중에 보낸 하인 [[임운]]에게 철퇴를 맞았다. 그러나 [[수양대군]]과 [[한명회]]등이 거사를 시행하던 중에 가까스로 살아나 가마를 탄채, 여장을 하고 수하 원구를 통해 사대문을 문을 열것을 말하자 열어주질 않으니 둘째며느리의 친정집으로 피신했으나, 새벽녘에
[[양정]]과 [[이홍상]] 등에게 발각되어 목이 잘려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 당시에 양정이 "역적의 괴수 김종서는 나오너라!" 라고 하니 김종서의 마지막 남은 원구가 양정의 앞길을 막자 양정이 원구의 가슴을 미친듯이 난자하였다. 이번엔 이홍상이 "역도를 타도하니 썩나오너라" 라고 하였다. 이에 김종서가 방문을 열고, "네 이놈 양정, 네놈은 지난 날 내가 육진을 개척하던 중 내가 와서 도적들을 데려와 나를 협박하고 온갖 해괴한 짓을 하지 않았느냐! 그때 내가 인정으로 네놈을 살려주었건만 벌써 그 은혜를 잊었느냐" 하니 양정이 "시끄럽다. 니 놈은 지금 역적이니 내 그 죄를 묻는것이다. 서둘러 네놈은 형벌을 받으라" 하니 김종서가 "정승이 어찌 걸어나가겠느냐 [[초헌]]을 가져오너라" 라고 말을 하는 그 순간, 김종서는 순진하게도 자신이 투옥되는 줄 알고 있었다. 양정이 갑사들에게 김종서를 끌어내게 한 뒤, 김종서의 목을 칼로 베었다.
거사 다음날 아침에 자신의 아들인 [[김승규]]를 비롯해 [[황보인]], [[조극관]], [[민신]], [[이양]] 등과 함께 [[대역모반죄]]라는 누명을 쓰고 [[저자거리]]에 [[효시]](梟示)되었다.
그러나 이를 눈물로 반대하던 재상 [[허조]]의 아들 허후 또한 유배를 가서 사약을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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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후 ===
사후 [[계유정난]] 및 [[단종복위운동]]으로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은 끝내 죽게되고, 그와 죽은 인파는 너무 커서 함길도 도절제사 [[이징옥]]에게도 불똥이 튀었다. 수양대군이 함길도는 아직 이징옥이 있어 위협을 느끼자 지난날 김종서를 탄핵하던 박호문을[[박호문]]을 함길도로 보낸다. 신임 함길도 도절제사가 되는것이다. 그러나 해임되는 이징옥은 믿지못했다. 자신이 아버지처럼 모시는 김종서가 도성에 큰일이 있기 전에 부르지 않겠다고 했기에 소수의 군사들을 이끌고, 박호문에게 물어보러간다. 박호문에게 수양이 난을 일으켜 죄상을 죽이고 어린왕을 겁박한다는 말을 듣자, 이에 반발하여 박호문을 죽이고 여진족의 추장들과 손을잡고 스스로를 대금황제로 칭하고 난을 일으키지만 종성판관 [[정종]]의 밀사로 난은 실패하였다. 이 난으로 훗날 [[이시애의 난]]이 일으키게 되는 사건이 되게 이어졌다. 김종서가 [[함길도]]와 친분이 두텁기 때문이다. 그의 신원은 그가 죽은 뒤 293년만에 [[영조]]때 복구되고 충익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지금까지 단종조의 충의의 상징으로 우리에게 기억된다.
 
== 6진 개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