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칼라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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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페라 가수 생활 ===
1947년 [[밀라노]]의 라 스칼라 오페라단에 입단하고, 《[[청교도]] (I puritani)》의 단역으로 캐스팅되었으나 주인공 엘비라 역으로 낙점된 성악가의 유고로 예정에 없이 그가 캐스팅되었다. 대역으로 투입된 칼라스는 3일의 연습으로 무대에 섰는데 호평을 받았다. 이어 [[레나테 테발디]]가 갑자기 아프게 되어 [[아이다]]의 주연 아이다 역을 맡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이때 스칼라 오페라단은 칼라스에게 아이다 역의 대역으로 투입했고, [[아이다]] 공연으로 크게 호평을 받으면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청교도》의 엘비라 역, 《아이다》의 아이다 역, 《토스카 Tosca》의 토스카 역 등을 소화해낸 뒤 《노르마》, 《루치아 디 람메르무어(Lucia di Lammermoor)》 등의 주인공역으로 호평을 받았다. 특히 토스카 공연 중에는 열연하던 중 가발에 불이 붙었으나 끝까지 아리아를 부르기도 했다. [[1949년]]에는 [[베니스]]에서 활동하였으며 [[1950년]]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에서 《아이다》의 타이틀 롤을 불렀고, [[1951년]] [[1월]] 라 스칼라 극장의 시즌 개막공연에서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1951년부터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을 중심으로 활약하여 《[[노르마 (오페라)|노르마]]》, 《안나 보레나》, 《메데아》 등 발굴되지 않았던 명작에 출연하였으며, [[1952년]]에는 코벤트 가든의 초청을 받아 노르마, 토스카 등을 선보였다. [[1954년]] [[11월 1일]] [[시카고 오페라]] 극장에서 상영된 노르마(Norma)에서 노르마 역으로 미국에서 데뷔했고, [[1956년]] [[10월 29일]] [[뉴욕 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상영된 노르마에서도 캐스팅되었다. 1957년 이후로는 [[메트로폴리탄 가극장]]에서 활약하였다.
 
그는 미국과[[미국]]과 [[유럽]] 전지역의 극장에서 공연하거나 초청받았고 이탈리아 오페라, 프랑스 오페라, 독일 오페라, 영국 오페라와 현대 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의 오페라와 뮤지컬에 주연과 조연으로 출연, 소화하였다. 성역이 넓고 성량도 풍부하며 레퍼토리도 다양하였다. 스케일이 큰 연기 및 가창표현, 비범한 발성 능력을 요구하는 다양한 배역을 소화해냈다. 그는 동시대의 소프라노 중 [[레나타 테발디]]와 종종 비교되었으며, 토스카나 나비부인 등의 주연을 놓고 경합을 벌이기도 했다. [[1958년]] 파리 오페라제에 초청되었다. 당시 파리 공연 중 그는 선박왕 오나시스를 만나는데, 오나시스는 VIP석에서 그의 노래 모습을 지켜보다가 매료된다. 이후 오나시스는 그에게 계속 구애해왔다.
 
[[1965년]] [[7월]] [[영국]] 런던 코벤트 가든에서 상영된 [[토스카]]의 주연 토스카 역을 맡아보았고, [[1965년]]부터는 오페라 연출, 연기지도 등도 맡아보았다. [[1970년]]에는 영화 [[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한 파졸리니의 영화 《메데아 Medea》에 출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