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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 교주가 된 김교헌(金敎獻)은 총본사를 동만주 화룡(和龍)으로 옮긴 뒤 홍범규칙(弘範規則)을 공포하는 한편, 비밀결사단체인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여 무장독립운동단체인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발전시켰으며 [[1920년]]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에서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일제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다음해에 대토벌작전을 전개하여 수많은 교도들을 무차별 학살하였으며, 김교헌은 통분 끝에 병으로 죽었다. 김교헌은 [[대종교]]를 제도적으로 정립하고 역사적으로 고증하기 위해 『[[신단실기]]』(神檀實記), 『[[신단민사]]』(神檀民史), 『[[단조사고]]』(檀祖事攷) 등을 저술하였다.
 
3세3대 교주가 된 [[윤세복]](尹世復)은, 일제의 압력을 받은 길림성장(吉林省長) 장쭤상(張作相)에 의해 <대종교 포교금지령>이 내려지자 총본사를 발해의 옛 도읍터였던 동경성(東京城)으로 이전, 대종학원을 설립하고 대종교서적간행회를 발족시켜 『삼일신고』, 『종지강연』 등을 간행하였다. 그러나 천전(天殿) 건립을 서두르던 중 [[1942년]] [[11월]] [[윤세복]] 외 20명의 간부가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한 단체구성>이란 죄목으로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고문으로 사망하거나 옥사하였다.<ref>《종교학대사전》, 대종교, 한국사전연구사(1998년)</ref>
 
== 저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