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 사르코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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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코지 가는 [[신성 로마 제국의 페르디난트 2세|페르디난트 2세]]로부터 [[1628년]] [[9월 10일]] 귀족이 된 헝가리 출신 가족이다. 농부였던 한 조상이 터키군과 싸웠다, 하지만 귀족 작위는 획득하지 못하고 귀족처럼 이름에 자신들의 고향을 넣을 수 있는 권리와 가문의 문장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취득하였다.
 
사르코지 가는 [[부다페스트]] 동쪽 92Km의 알라티안 (Alattyán) 이라는 마을의 영지와 작은 성을 소유하였지만<ref name="nytimes.com">{{웹 인용 | url = http://www.nytimes.com/2007/05/15/opinion/15tue4.html?_r=2&th&emc=th&oref=slogin&oref=slogin | 제목 = The New French President’s Roots Are Worth Remembering | 작성일자 = 2007-05-15 | 확인일자=2008-09-28}} </ref> 니콜라 사르코지가 자주 말하듯 사르코지 가의 생활은 평범했다.
 
사르코지의 아버지, 팔 사르코지는 [[부다페스트]]에서 [[1928년]] [[5월 5일]] 출생하였고 사르코지의 할아버지가 부시장으로 일하던 [[솔노크 ]](Szolnok) 시청에서 공무원으로 일했다.
 
[[1944년]] 소련군이 [[헝가리]]를 점령하자, 사르코지 가족의 재산은 몰수됐고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오스트리아]]와 [[독일]]을 거쳐 팔 사르코지는 [[프랑스]]외인부대에 5년간 근무하기로 계약을 한다. [[1948년]] 그는 폴 사르코지(Paul Sarközy de Nagy-Bocsa)란 이름으로 프랑스인이 된다.
 
[[1947년]] 법학을 공부하고 있던 [[세파라딤]]계 치과의사의 딸 '안드레 말라'(Andrée Mallah)를 만나서 결혼을 한다.
 
니콜라 사르코지는 [[파리 시|파리]]에서 [[1955년]] [[1월 28일]] 출생하였다. 섬유 산업체를 운영하는 기욤(Guillaume)과 소아과의사, 생물학자인 프랑수아(François)는 그의 형제이다. 팔 사르코지는 [[1959년]] 이혼을 하고 사르코지의 어머니는 학업을 다시 시작해서 변호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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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번째 학년을 통과하지 못하고 재수강한 뒤 [[1973년]] [[바칼로레아]](baccalauréat)를 취득했다.
 
파리 10대학교에서 [[1978년]] 법학 석사를 취득했고 후에 씨앙스포[[파리정치대학]](I.E.P)에 입학했지만 영어 성적이 저조해서 학위는 받지 못했다. [[1980년]]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81년]]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 사생활 ===
[[1982년]] [[9월 23일]] 니콜라 사르코지는 마리 도미니크 퀼리올리(Marie-Dominique Culioli)와 결혼을 했고 피에르(Pierre),[[1985년]] , 장피에르(JeanPierre), [[1986년]] 장(Jean), 두 명의 아들을 낳았다.
 
[[1984년]] 그가뇌이쉬르센 '뇌이으 쉬르 센'시장으로 재임하고 있을 때 그는 텔레비전 진행자 '자크 마탱'(Jacques Martin)와 세실리아(Cécilia Ciganer-Albéniz)의 결혼식의 주례를 했다. 세실리아와 사르코지는 곧 숨겨진 관계를 시작한다. [[1989년]] 둘은 서로의 배우자를 떠나고 결합을 한다. [[1996년]] [[루이뷔통루이비통]]의 소유자 [[베르나르 아르노]](Bernard Arnault)와 부이그(Bouygues)사의 마르탱 부이그(Martin Bouygues)가 증인이 된 가운데 그들은 결혼식을 올렸고 [[1997년]] 2번째두 번째 결혼에서 사르코지는 아들 루이(Louis)를 얻는다.
 
[[2007년]] [[10월 18일]] 그들은 상호 합의하에 결별을 했다고 이혼을 하기 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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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 초기 ===
==== 샤를 파스카와의 만남 ====
[[1974년]] 사르코지는 [[프랑스]]의 정당인 공화국 민주동맹[[공화국민주동맹]](UDR)에 가입을 했고 거기서 [[샤를 파스카]](Charles Pasqua)를 만나 자크 샤방델마 (Chaban-Delmas)의 선거운동을 하였다. 다음 해 그는 [[오드센(Hauts-de-Seine) 주|오드센]] 지역의 청년 당원 대표가되었다. [[1976년]] 그는 샤를 파스카의 후원으로 새로 생긴 정당인 공화국연합당[[공화국연합]](RPR)에 입당했다. 그는 [[1976년]] 뇌이으 쉬르 센[[뇌이쉬르센]] 지역의 당 책임자가 되었고 [[1977년]] 뇌이으 쉬르 센'와뇌이쉬르센과 퓌토(Puteaux) 지역 대표가 되었고 같은해 뇌이으 쉬르 센뇌이쉬르센 시의 정책 위원이 되었다.
 
그는 [[1980년]] [[자크 시라크]]후보의 청년 지지연대의 책임자가 되었다.
 
[[1983년]] 그는 28세의 나이로 [[뇌이으뇌이쉬르센 쉬르 센 시장]]에시장에 당선되었다.
 
==== 발라뒤르 정부와 예산부 장관 시절 ([[1993년]]-[[1995년]]) ====
[[1993년]] 3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우파가 큰 차이로 승리를 하자 니콜라 사르코지는 또 다시 '뇌이의 쉬르 센'에서뇌이쉬르센에서 64.9%의 표 획득으로 하원의원이 되었고 '[[에두아르 발라뒤르'(Édouard]] Balladur)총리의 행정부의 예산부장관이 되었다. [[프랑스]] 정부의 대변인으로서, 그는 대중들에게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다.
 
[[1993년]] [[3월 13일]], «"인간 폭탄»"이라고 불린 '에릭에리크 슈밋'슈미트(Érick Schmitt) 사르코지가 시장으로 있는'뇌이의 쉬르 센'의뇌이쉬르센의 한 유치원에서 21명의 어린이들을 인질로 잡고있을잡고 있을 때, 사르코지는 그와 직접 협상을 했고 아이들을 석방시켰다. 물론 지금도 사르코지가 이 사건에 직접 참여한 것에 대해 말들이 많지만, 이 사건은 그에게 [[프랑스]]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해주었다.
 
==== 에두아르 발라뒤르를 위한 지원 ====
[[1995년]] [[프랑스]] 대선당시 사르코지는 [[자크 시라크]] 아닌 '[[에두아르 발라뒤르']]를 지원했다. 사르코지는 '에두아르 발라뒤르' 선거 위원회 대변인이 되기 위해서 [[프랑스]] 정부 대변인을 사임했다. '에두아르 발라뒤르'가발라뒤르가 오랫동안 여론 조사에서 우위를 차지했지만, 그는 결국 [[프랑스]] 대선 1차선거에서 18.6%의 저조한 득표율과 함께 탈락했다. [[자크 시라크|시라크]]의 당선으로 그는 [[프랑스]] 정부에서 어떠한 장관직도 얻지 못했다. 같은 당 [[자크 시라크]]후보의 당선으로못했고, 당내 사르코지 입지는 좁혀졌고좁혀졌다. 이 상황은 [[1997년]]까지 계속된다.
 
[[1997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좌파의 승리는 사르코지의 당내 입지를 높여주는 결과를 낳았다. [[1997년]]부터 [[1999년]]까지 그는 공화국연합당(RPR)[[공화국연합]]의 총서기로 활동했다.
 
==== [[1999년]] [[유럽 연합]]의회 선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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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 사르코지의 선거 운동 슬로건은 «일을 더하고 더 많이 벌자!»(travailler plus pour gagner plus)였다. 선거를 위해 재산 신고를 할 때 그가 신고한 재산은 약 2백만 유로이다.
 
[[2007년]] [[1월 14일]] 정당 '[[대중운동연합'(UMP)]]의 유일한 대선후보로 69.06%의 참가율로 98.09%의 당내 찬성을 얻어 그는 ''대중운동연합'의대중운동연합의 공식후보가 되었다.
 
[[2007년]] [[3월 26일]] 니콜라 사르코지는 대선 운동에 전념하기위하여 내무부장관 자리에서 물러난다물러났다.
 
[[2007년]] [[4월 22일]] 니콜라 사르코지는 [[프랑스]] 대선 1차선거에서 우파 역사상 2번째로 높은 기록인 31.18%의 득표를 얻었다. [[사회당 (프랑스)|사회당]] 소속의 [[세골렌 루아얄]] 텔레비전 공개 토론회 후 그는 2차 선거에서 53.06%(18 983 138 표)를 획득함으로써46.94%(16 790 440표)를 획득한 [[세골렌 루아얄]] 물리치고 [[프랑스]] 5공화국의 6번째, [[프랑스]] 26대 대통령이 되었다.
 
 
대선 결과가 발표되자 좌파의 반대 집회가 [[프랑스]] 15개의 대도시에서 일어났고 그 중 몇몇 집회에서는 폭력사태가 벌어졌고 몇몇 도시들에서는 폭력사태가 대선이 있던 주 주말까지 계속되었다.{{출처}}
 
[[5월 17일]] '대중운동연합'(UMP)의대중운동연합의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2007년]] [[5월 16일]] 전임자인 [[자크 시라크]] 대통령에게 권력을 이양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