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극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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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공방전과 음극선 */==
이미 18세기에 그룬멜트와 워트슨이 진공 중에서의 [[방전]]현상에 주목했고, 19세기에 와서는 패러데이가 패러데이 암계(暗計)를 발견하는 등 대체적인 연구가 있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연구는 진공 기술의 개발에 의하여 좋은 진공이 얻어진 뒤부터였다. 본의 기계사 [[하인리히 가이슬러|가이슬러]]가 뛰어난 수은진공펌프를 제작하였고, 이것을 이용하여 유리관 내에 약간의 기체를 봉한 방전관(가이슬러관)을 만들어 본대학의 교수 플뤼커(1801-1868)가 이를 물리학 연구에 이용하였다. 플뤼커는 스펙트럼의 휘선이 물질에 고유함을 발견하여 물질검출에 이용할 수 있음을 보였으나, 그 후 히토르프(1824-1914)와 협동하여 1858년에는 압력을 낮추어 패러데이 암계가 확대되는 것과 음극에 가까운 유리벽이 녹색 형광을 발생하는 것, 형광이 발생되는 곳이 [[자석]]의 영향으로 변하는 것 등을 관찰하였다. 이를 이어받은 히토르프는 음극 앞에 놓은 고체의 그림자가 생기는 점으로 보아, 음극에서 방사선이 나온다고 추측하고(1869년), 골트슈타인(1850-1930)은 철저한 실험을 수행함과 동시에 이 방사선을 음극선이라고 하였다. 그 정체는 전혀 불명이었으나, 영국에서는 C. F. 하리(1828-1883) 이후 입자의 흐름으로 보는 설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날개바퀴의 실험 등으로 알려진 [[윌리엄 크룩스|크룩스]]는 이 입자의 흐름을(액체·기체·고체와 함께) 물질의 제4상태라고 불렀다. 이에 대하여 비데만(1826-1899), 골트슈타인, 헤르츠 등 독일의 물리학자들은 [[에테르]]의 진동으로 보는 파동설을 취하여 영국학파와 대립하였다. 헤르츠는 전지를 사용한 고전압에 의하여 음극선이(펄스적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나오는 것을 보였고, 또 전하의 검출 및 전계에 의한 굴곡이 어느 것이나 부정적으로 끝났기 때문에 입자설을 배제파동설의 약점이었던 투과성 문제(파동인 빛은 유리 등 투명체를 통과한다)에 대하여서도 몇 개의 금속박을 투과하는 것을 보이고(1891), 파동설을 강조하였다. 얼마 후에 제자인 레나르트(1862-1947)가 이 실험을 추진, 방전관 밖으로 음극선을 끌어 내어 파동설은 승리한 듯이 보였다. 그러나 한편 영국의 슈스터(1851-1934)는 입자설을 뒷받침하는 연구를 착착 진행시켜 1890년에 이르러서 음극선 입자의 비전하(電荷와 質量의 比)의 상한과 하한을 견적하고, J. J. 톰슨은 음극선 입자의 속도를 측정하여(1894) 광속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작은 것을 나타내었으며, 프랑스의 페랭(1870-1942)은 음극선이 실제로 음전기를 지니고 있음을 실증(1895), 비헤르트(1861-1928), 카우프만(1871-1947)도 비전하의 값을 추정하여 사태는 점점 음극선 입자설로 굳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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