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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일자=2007-10-26
}}
</ref>)은 [[한국]]의 문학평론가이며문학평론가, 영문학자이다. 호는 눈솔이며 필명으로 설송(雪松), 화장산인(花藏山人)을 썼다.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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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색동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하고 잡지 《어린이》에 동시와 동화를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창작 활동과 문예운동에 뛰어들었다. [[1926년]]에는 [[이하윤]], [[김진섭]] 등과 함께 [[해외문학연구회]]를 조직하여 해외문학파를 형성하였다. 해외문학연구회의 기관지인 《해외문학》에 [[에드거 앨런 포]]와 [[조지 버나드 쇼]]를 논하는 평론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평단 활동을 시작하였다.
 
1930년대 중반까지 활발한 평론 발표로 대표적인 해외문학파 평론가로서 활동하였으며, 특히 외국 이론의 단순한 소개에 그치지 않고 해외문학파가 [[카프]] 계열의 계급주의 문학과 우파 민족주의 문학과 함께 해외문학파가 문단을 삼분하는 것으로 자평하면서 하나의 문학적 유파를 자처하였다. 〈조선 현 문단에 소(訴)함〉(1931)이라는 평론에는 이러한 해외문학파의 관점이 잘 드러나 있고, 한국의 프롤레타리아 문학 운동이 [[일본]]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단순히 모방하는데 머무르면서그치면서 한국적 특수성을 무시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하고 있다.
 
귀국한 뒤에는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근무했으며, [[1931년]] [[유치진]] 등과 함께 [[극예술연구회]]를 창립하는데 참가해 신극 운동에 관심을 보였다. [[1932년]] [[송석하]], [[손진태]]와 함께 [[조선민속학회]]를 창립하였고, [[조선어학회]]와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에도 참여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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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말기에 [[조선문인협회]]의 간사, 상무간사 등을 지내며 친일 평론을 발표했다. [[1940년]] 《[[매일신보]]》에 실은 〈애국문학의 제창〉을 시작으로 [[태평양 전쟁]] 지원을 위한 순회강연에 참가한 뒤 이를 기록으로 남기는 등 총 11편의 친일 글이 남아 있다<ref>김재용, [http://www.artnstudy.com/zineasf/Nowart/penitence/lecture/03.htm 친일문학 작품목록] 《실천문학》 (2002년 가을호)</ref>.
 
광복 후에는 [[서울대학교]] 대우교수와 [[중앙대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장 등을 역임하며 시인이자 영문학자로 활동했고, 한국 시의 영어 번역에 주력했다.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위원장을 지냈으며, 《영역 한국시선》으로 제4회 번역문학상을 수상하였다.
 
== 사후 ==
 
[[2002년]]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과 [[2005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1차 명단]]에 모두 들어 있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문학 분야 외에 친일단체와 전쟁협력 부문에도 정인섭을 포함시켰다. 연세대학교와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낸 정인섭은지내 연세대의 교내 단체인 [[민주노동당 (대한민국)|민주노동당]] 학생위원회가 2005년 공개한 '연세대학교 친일파 명단'과 서울대 교내 단체가 발표한 '서울대학교 출신 친일인물 1차 12인 명단'에 선정되기도 하였다<ref>{{뉴스 인용
|저자=김민지 기자
|제목=학내 친일 인사 명단 발표 및 본관 항의 방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