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택상: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400번째 줄:
 
==== 군정 시절 ====
[[1961년]] [[5월]] [[5·16 군사 정변]] 뒤에 [[박정희]]가 [[한민당]],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 [[민주당 (대한민국, 1955)|민주당]] 등의 구정치인들을 정계에서 배제하려 하자 반박(反朴)진영의 지도자가 되었으며<ref name=autogenerated1 /> , 박정희가 집권하자 장택상은 반독재 야당 지도자로 활동했다.<ref name=autogenerated1 />
 
그 뒤 정치정화법이 해제되자 다시 정치활동을 재개하여 자유당 부당수로 활동했다. [[1963년]] [[박정희]] 집권 후 구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인사인 [[윤치영]], [[임영신]] 등이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을 탈당하여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으로 건너갔지만 그는 자유당을 지켰고 [[1963년]] [[9월]]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 총재가 되었다. 63년 [[1월]] 이승만 박사 환국추진회에 동참하였다.
 
[[1963년]] [[3월 16일]] 오후 2시 55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의 초대로 전 [[대통령]] [[윤보선]], [[신민당]] 위원장 [[김도연]], 초대 [[국무총리]] [[이범석]] 등과 함께 [[박정희]]와 면담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6>영시의 횃불-박정희대통령 따라 7년(김종신, 한림출판사, 1966) 179페이지</ref><ref>김입삼, 초근목피에서 선진국으로의 증언 (한국경제신문사, 2006) 174페이지</ref> 김희덕(金熙德) 외무 겸 국방위원장, 유양수 재경위원장, 홍종철(洪鍾哲) 문사위원장 등이 3.16 성명을 발표하게 된 동기를 번갈아가며 설명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6 />
 
김희덕 외무 겸 국방위원장은 '도자란지도자란 만화경 가은 상황에도 적응해야 한다' 라고 말하자, 장택상은 '그러한 지도자가 되기 위해 박의장은 다시 3.16 성명을 번의할 수 없는가' 하고 제안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6 /> [[민주주의]]를 정의를 내리고 최고위원들을 설명하려 들자 최고위원들은 분노하였다.<ref>영시의 횃불-박정희대통령 따라 7년(김종신, 한림출판사, 1966) 180페이지</ref> 논쟁이 격화되자 장택상은 5.16때 살아난 것만 해도 다행인데 박의장 말에 조금도 찬성 않다가는... 국민들 앞에 얼굴도 못들 것 같기도 하다고 대응했다.<ref>영시의 횃불-박정희대통령 따라 7년(김종신, 한림출판사, 1966) 182페이지</ref>
 
1963년 [[3월 16일]] [[박정희]]가 군정연장을 선언하는 3·16 선언을 거두지 않자, [[3월 19일]] 윤보선·[[김도연 (1894년)|김도연]]·장택상·[[김준연]]·[[이범석 (1900년)|이범석]] 등은 [[박정희]]에게 3·16 성명의 저의를 추궁하<ref>김용욱, 《한국정치론》 (오름, 2004) 346페이지</ref>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