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충단공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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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동국대학교]]와 [[신라호텔]] 사이에 있다. 본래 장충단은 현재 장충단 공원을 포함하여 [[신라호텔]], [[국립극장 (대한민국)|국립극장]], [[자유센터]], [[서울타워호텔]] 터를 아우르는 큰 규모였다. [[청계천]]의 [[수표교]]를 옮겨놓았고, 서울시 유형문화재 1호인 장충단비가 있다. 안쪽으로는 경로당과 체육 시설, 야외 무대 등이 있으며, [[사명대사]]를 비롯하여 [[이준 (외교관)|이준]], [[이한응]], [[유관순]]의 동상도 세워져 있다.
 
이 공원을 소재로 한 가수 [[배호]]의 노래 〈안개 낀 장충단 공원〉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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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장충단 공원은 [[명성황후]]가 살해된 [[을미사변]] 때 순국한 충신, 열사들을 제사하기 위해 [[1900년]] 9월 [[대한제국 고종]]이 ‘장충단’이라는 사당을 설치한 데서 비롯되었다. 고종은 [[어영청]]의 분소로 서울의 남쪽을 지키는 남소영(南小營) 자리에 장충단을 짓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게 했다. 처음에는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 영관 염도희, 영관 이경호를 주신으로 제향하고, 김홍제, 이학승, 이종구 등 장병들을 배향했으나, 다음해 궁내부 대신 [[이경직]]을 비롯하여 [[임오군란]], [[갑신정변]] 때 죽은 문신들도 포함하였다.<ref name="명성황후">{{서적 인용|저자=한영우|제목=명성황후와 대한제국|꺾쇠표=예|발행일자=2001-10-20 |판=초판 1쇄|출판사=효형출판 |출판위치=서울
|id=ISBN 89-86361-57-4|쪽=54쪽}}</ref>
 
그러나 을미사변을 일으킨 일본의 세력이 강성해지면서 [[1908년]] 제사는 중단되었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게 살해되었을 때 거국적인 [[국민대추도회]]라는 행사가 장충단에서 열렸다. 국민대추도회 추진 세력들은 장충단에 이토의 사당을 짓고 추모제를 지냈다.<ref> {{뉴스 인용|url=http://www.jksm.com/Service4/ShellView.asp?TreeID=502&dataID=200303200949000006|제목=사건으로 본 한국의 종교 - 안중근의사 순국 93주년 지금이라도 유해찾자|저자=김삼웅|출판사=종교신문|작성일자=2003-03-25|확인일자=2008-05-05}} </ref>
 
[[한일 병합]] 후인 [[1919년]]에는 장충단 일대에 [[벚나무]]를 심어 일본식 공원이 조성되었다. [[창경궁]]과 유사하게 역사적 의미가 있는 장소가 위락 시설로 바뀌었다. 일본은 공원에 [[제1차 상하이 사변|상하이 사변]] 때 사망한 일본군 육탄3용사의 동상을 세웠고,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절인 [[박문사]]도 [[1932년]] 인근에 세워졌다.<ref name="명성황후" /><ref> {{뉴스 인용
|url=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44314
|제목=<nowiki>신라호텔 자리는 이등박문 추모 사찰터 - [서울 역사산책 80] '독도 사태' 맞아 다시 돌아보는 박문사</now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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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자=2005-03-23
|확인일자=2008-05-02
}} </ref>
 
해방 후 일본 군인들의 동상과 박문사는 철거되었으나, [[한국 전쟁]]으로 사당의 부속건물이 파괴되었다. 1959년 청계천이 복개되자 수표교를 철거하여 이곳으로 옮겼으며, 1969년에는 영빈관 내에 있던 장충단비를 수표교 옆으로 옮겼다.<ref name="명성황후" />
 
[[1957년]] [[5월 25일]] [[대한민국 제1공화국|제1공화국]]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의 독재에 성토하기 위해 야당의 국민주권옹호 투쟁위원회 주최로 서울 시민에 약 20만여 명이 모인 야당 시국강연회에서 전무후무한 여당과 결탁한 폭력배들에 의한 [[장충단집회 방해사건]]이라는 정치테러사건이 일어났다.
[[1971년]]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 전 4월 18일 장충단 공원에서 약 100만 명의 시민이 모인 가운데 김대중 후보와 박정희 후보의 유세대결이 유명하기도 하다.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는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김대중]]은 “[[박정희]]에게 진 것이 아니라 [[이후락]]에게 졌다.”라고 말했다. 이후 [[유신헌법]]이 발효되었다.<ref>이계성 논설위원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0911/h2009110121584724440.htm (지평선/11월 2일) 유신 권력의 2인자] [[한국일보]] 2009년 11월 1일 작성</ref><ref>김대홍 기자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801644 넌 족발 뜯으러 가니? 난 역사 보러 가는데] [[오마이뉴스]] 2008년 1월 18일 작성</ref>
장충단의 처음 위치는 유실되었으나, 지금의 장충단 공원 남쪽 끝인 어린이야구장 건너편 근처로 추정되고 있다. 공원 입구에 남아 있는 장충단비의 ‘장충단’(奬忠壇)이라는 글씨는 [[대한제국 순종]]이 황태자였을 때 쓴 것이다. 비 뒷면에는 [[민영환]]의 글이 새겨져 있다.
 
== 문화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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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웹 인용 |url=http://kr.dic.yahoo.com/search/enc/result.html?pk=17634300 |제목=장충단 공원 |출판사=야후 백과사전 |확인일자=2008-09-04 }}
* {{웹 인용 |url=http://preview.britannica.co.kr/bol/topic.asp?article_id=b18j3292a |제목=장충단 공원 |출판사=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확인일자=2008-09-04 }}
* {{뉴스 인용 |url=http://www.hani.co.kr/section-009000000/2002/08/009000000200208012051938.html |제목=기억 아스라한 '항일'의 성지 |저자=황준범 |출판사=한겨레 |작성일자=2002-08-01 |확인일자=2008-04-27 }}
 
== 같이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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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깥 고리 ==
 
 
{{서울특별시의 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