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호의 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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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향 ==
탐라에서 일어난 목호의 난을
최영이 목호들과의 전쟁으로 제주도로 내려가 있는 사이에 개경에서는 공민왕이 시해되었고, 명의 사신은 3백 필의 말을 가지고 돌아가던 중 개주참(開州站)에서 호송을 맡았던 고려의 관리 김의에 의해 피살되었다. 이는 고려와 명의 외교관계를 한참 동안 험악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또한 명의 [[철령위]](鐵嶺衛) 설치에 반발하여 최영은 요동 정벌을 주장하였는데, 이때 직접 군사를 지휘하려는 최영을 [[우왕]](禑王)은 "선왕(공민왕)이 시해된 것은 경(최영)이 남쪽(제주)으로 정벌하러 나가서 개경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ref name="Goryeosa"></ref>이라며 한사코 자신의 곁에 붙잡아두려 하였고, 결국 최영 대신 요동정벌군을 지휘하게 된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威化島)에서 군사를 돌려 개경으로 쳐들어와([[위화도 회군]]) 최영을 죽이고 우왕을 폐위시킴으로서 [[조선]] 건국의 단초를 마련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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