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호의 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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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향 ==
탐라에서 일어난 목호의 난을 진압함으로서진압함으로써 그때까지 반은 고려, 반은 몽골에 귀속되어 있던 제주는 완벽하게 고려에 귀속되었지만, 제주는 전보다 더 많은 마필 공납 요구에 시달려야 했다. [[우왕]] 5년([[1379년]])부터 [[공양왕]] 4년([[1392년]])에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고려에서 명에 바친 말은 약 3만 필로 그 가운데 2만 필 이상이 탐라산 말이었다. 공민왕 19년([[1370년]])에 고려가 기왕의 연고를 내세워 탐라를 계속 고려가 관할하게 해달라는 입장을 밝혔을 때 그것을 인정하거나 부인하는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지 않은 채 고려를 강압해 탐라의 말을 가져가는 데서 그쳤던 명은 우왕 12년([[1386년]]) 탐라 말을 구매할 의사를 고려에 밝혔다가 바로 이듬해에 이를 철회하면서 공식적으로 탐라에 대한 고려의 관할권을 인정하였다.
 
최영이 목호들과의 전쟁으로 제주도로 내려가 있는 사이에 개경에서는 공민왕이 시해되었고, 명의 사신은 3백 필의 말을 가지고 돌아가던 중 개주참(開州站)에서 호송을 맡았던 고려의 관리 김의에 의해 피살되었다. 이는 고려와 명의 외교관계를 한참 동안 험악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또한 명의 [[철령위]](鐵嶺衛) 설치에 반발하여 최영은 요동 정벌을 주장하였는데, 이때 직접 군사를 지휘하려는 최영을 [[우왕]](禑王)은 "선왕(공민왕)이 시해된 것은 경(최영)이 남쪽(제주)으로 정벌하러 나가서 개경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ref name="Goryeosa"></ref>이라며 한사코 자신의 곁에 붙잡아두려 하였고, 결국 최영 대신 요동정벌군을 지휘하게 된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威化島)에서 군사를 돌려 개경으로 쳐들어와([[위화도 회군]]) 최영을 죽이고 우왕을 폐위시킴으로서 [[조선]] 건국의 단초를 마련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