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민족청년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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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족청년단'''(朝鮮民族靑年團·약칭 족청)은 [[이범석 (1900년)|이범석]]을 중심으로 [[1946년]] [[10월 9일]] ‘국가지상, 민족지상’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창설한 [[반공주의]]적 우익 민족 청년 운동 단체이다. <ref name="조선민족청년단">《한국민족문화대백과》, 조선민족청년단(朝鮮民族靑年團),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역사 ==
=== 구성 ===
[[이범석 (1900년)|이범석]]이 [[1946년]] [[10월]] 민족정신의 전통을 계승할 청년운동의 모체로서 결성한 단체이다. 약칭 ‘족청(族靑)’이라 한다. 이승만(李承晩)이 집권한 뒤 실시한 청년단체 통합에 따라 [[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으로 통합, 해체되었다. 족청의 초기 면모를 보면, 단장에 [[이범석 (1900년)|이범석]], 부단장에 [[안호상]](安浩相), 전국위원에 김관식(金觀植)·[[김활란]](金活蘭)·이철원(李哲源)·[[현상윤]](玄相允)·이용설(李容卨) 외 32명, 이사에 [[백낙준]](白樂濬)·최규동(崔奎東) 외 10명, 상무이사에 김형원(金炯元)·노태준(盧泰俊)·박주병(朴柱秉)·설린(薛麟)·김웅권(金雄權) 등으로 구성되었다. <ref name="조선민족청년단"/>
 
=== 강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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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활동 ===
조선민족청년단은 미군정 당국의 지원을 받아 [[1946년]] [[11월]] [[수원]]에 훈련소를 설치하고 1개월 과정인 청년간부훈련에 착수하였다. 당시 훈련지원자 수는 2만여 명에 이르렀으며, 그들 중에서 200명을 선발, [[1946년]] [[12월]] 제1기 훈련생 입소식을 가졌다. 제7기생부터는 여성간부훈련생도 입소시켰으며, 훈련은 이론부·실천부·기술부 등 5개 부문으로 나누었다. 이론 부문에서는 [[정인보]](鄭寅普)·[[안호상]]·배성룡(裵成龍)·설린 등 20여 명이 강론을 맡고, 실천 부문에서는 이범석 스스로가 1주 12시간의 강론을 맡아 조국의 현실과 새로운 청년운동의 방안, 혁명적 인생관, 혁명적 민족관, 구국구족운동(救國救族運動) 등의 인식화 교육에 힘썼다.
 
조선민족청년단은 청년들의 특질, 즉 생명력·정열·구지욕(求知慾)·자의식(自意識)·모험심·순진성 등을 청년운동의 생산력과 투쟁력으로 전환시켜나갔다. 강훈련을 받은 수료생들은 이범석의 휘하에서 뭉쳐, 각기 사는 고장과 소속되었던 단체로 돌아가 족청의 하부조직을 결성, 강화해 나감으로써 전국적인 막강한 조직을 형성하였다. 이와 같이 조직이 확장됨에 따라 정계와 사회의 일부에서는 광복군 활동의 연장, 독재운동단체, 심지어 용공단체라는 비판의 소리가 강하게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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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족청년단은 [[1951년]] [[12월]] 신당으로서 [[이기붕]](李起鵬) 중심의 자유당이 결성될 때, 별도로 부산의 동아극장에서 발기인대회를 갖고 강령·당헌 등을 채택함으로써, 결국 같은 이름의 두 자유당이 탄생하였다. 이른바 ‘원외자유당(院外自由黨)’이다. 이 족청계의 원외자유당에서는 1952년 5월의 정·부통령선거에 즈음하여 원내자유당의 기선을 제압, [[이승만]]을 대통령후보로, [[이범석 (1900년)|이범석]]을 부통령후보로 내세웠으나, 이범석은 낙선하고 무소속의 [[함태영]](咸台永)이 당선되었다.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의 전당대회는 정부통령 선거 후 40일 내에 소집하게 되어 있었는데, 전당대회에서 선거 결과에 따른 논공이 예상되어 족청계열은 유례 없는 정치적 격분에 휩싸였다. 족청계는 선거에 비협조적이던 인사들을 규탄하는 한편, 당외로도 공세를 폈다. 당시 [[국무총리]] [[장택상]](張澤相)과 [[내무부장관]] 김태선(金泰善)을 선거법 위반으로 고발하는 동시에 정치적 투쟁을 선언하기까지 하였다.
 
김태선은 실각하여 [[서울특별시장]]으로 물러앉고, [[장택상]]은 ‘고시사건(古市事件)’이라는 정략에 휘말려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정·부통령선거 후 숙청을 위한 족청계 주도의 전당대회가 1953년 5월에야 대전에서 열렸다. 이 대회는 자유당 안에서 그 종파적 투쟁으로 족청계가 당권을 전단(專斷)한 최고절정기였으며, 이것을 당시에는 조선민족청년단의 자멸을 초래한 발악적인 횡포기였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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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 ==
[[이범석 (1900년)|이범석]]은 청년들을 광복된 새 나라의 역군으로 조직화하고 훈련하는 것이 제일 시급한 일이라 판단하고, 미군정의 지원을 받아 ‘족청’을 창설했다.
 
미군정도 청년단체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1946년]] 중반 비밀리에 약 500만 달러와 미군 장비를 지원하고 훈련 고문으로 미군 대령 한사람 등을 특파하여 족청 결성을 지원하였다.<ref>[[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266쪽</ref>
 
문제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자금은 군정청이 아닌 일본 [[도쿄]]의 [[더글러스 맥아더|맥아더]] 사령부로부터 나왔다. 맥아더 사령부는 차량 지원에서부터 제복까지 모두 지원해 주었다.<ref name=autogenerated2>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266~267쪽</ref> <ref>최장집 외, 《해방전후사 인식 4》(한길사, 1989) 74, 94쪽</ref><ref>[[안호상]], <안호상 박사 회고록: 족청 해산>(문화일보) 1995년 3월 23일자 19면</ref><ref name=autogenerated1>그레고리 핸더슨, 박행웅·이종삼 옮김 《소용돌이의 한국정치》(한울아카데미, 2000) 224~225쪽</ref> [[안호상]]은 족청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 주었다.<ref name=autogenerated3>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268쪽</ref>
 
족청은 [[김활란]], [[백낙준]], 최규동, [[현상윤]] 등으로 이사회를 구성하였고 경기도 수원에 있는 구 일본군육군병원 건물에 족청 중앙본부를 설치하고 이곳에 훈련소를 마련하였다. 소련의 항의를 피하기 위해 비밀리에 수원 훈련소에서 약 7만명이 훈련을 받았다. 교육 목적은 장래에 군대였으며 이중 상당수가 국군에 편입되어갔다.<ref name=autogenerated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