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시국정화운동본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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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시국정화운동본부'''(時局湞化運動本部)는 [[대한민국]]의 정부 직속 특수 정보기관, 특별 행정기관이다. [[1961년]] [[3월 2일]] [[대한민국]]의 [[대한민국의 국무총리|총리]] [[장면]](張勉)이 특별 정보기관 설치 건의에 따라 설치한 기관이다. [[1961년]] [[5월 20일]] [[대한민국 중앙정보부|중정]] 설치로 폐지되었다.
 
[[1961년]] 봄부터 장면 총리는 십여 차례나 쿠데타 기도 정보를 보고 받거나 입수했다.<ref name="sijong">정윤재, 《정치 리더십과 한국 민주주의》(나남출판, 2003) 274페이지</ref> 그래서 겨우 [[1961년]] [[3월]]이 되어서야 시국 정화 운동 본부라는 직속 정보 기관이 설치 되었지만 별다른 역할은 못했다.<ref name="sijong"/> 약칭은 '''시국정화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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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본부장 ===
 
 
== 논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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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원의 엽관 운동 논란 ===
시국정화단 직원이 [[1961년]] 당시 [[박정희]]의 사주를 받은 [[김형욱]]에게 매수되어 논란이 되기도 했다. [[김형욱]]에 의하면 시국정화운동본부의 실력자인 박모에게 뇌물을 주었다고 증언하였다. 박정희의 지시 로 나는 [[육군 정보학교]] 교장 이었던 [[한웅진]]을 [[대한민국 육군|육군]]방첩부대(CIC)
대장으로 임명하고 혁명 계획 수행 에 따르는 전 정보 를 주관시키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하기도 했다<ref name="kimhy">김형욱, 《권력과음모: 전 KCIA 부장 김형욱의 수기》(뉴코리아타임스사, 1982) 23페이지</ref> 한다.
 
[[김형욱]]에 의하면 '없는 돈을 만들어 쑤셔넣어 주면서 까지 한웅진의 엽관 운동을 벌 였으나 그후 문제 의 박이 시국 정화 운동 본 브세 서 밀려나 혓탕 을 치고 만 것이다<ref>김형욱, 박사월, 《김형욱 증언:혁명과 우상 제1부》 (독립신문사, 1982) 34페이지</ref>'라고 하였다. 당시 [[민주당 (1955년)|민주당]] [[내각]]의 총리직속 정보기관 격이던 시국정화운동본부의 실력자 박이라는 사람을 만나, 없는 돈을 만들어 쑤셔 넣어 주면서까지 한웅진의 엽관운동을 벌였으나 그 후 문제의 박이 시국정화 운동본부에서 밀려나 허탕을 치고 만 것이었다.<ref name="kimhy"/> 뇌물을 받고 쿠데타 기도를 위한 [[김형욱]]의 엽관운동을 봐준 대가로 이 직원은 타 기관으로 전출되고 말았다.
 
== 기타 ==
시국정화단의 수립은 쿠데타에 대한 [[장면]]의 대응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뒤늦은 대응이라는 평가도 있다.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 때 존속되어 오던 많은 정보기관 이 [[대한민국 제2공화국|민주당 정부]] 에 의해 정리 폐지되었고, 그나마 남은 기관 조차 제대로 기능 을 발휘 하지 못했으며, 수사 분야 경찰이 대부분 해직되어 기능이 약화 된데다가 정보 를 입수해도 제대로 보고 하지도 않았다.<ref name="hangun208">한용원, 《한국의 군부정치》 (대왕사, 1993) 208페이지</ref> [[1961년]] [[3월]] 총리 직속 정보 기관으로 시국 정화 운동 본부를 설치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으며, 정치적 개입주의자 들은 정부의 폭동 진압 계획에 편승하여 쿠데타를 기도할 정도로 치밀해져 가고 있었다.<ref name="hangun208"/>
 
== 주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