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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장강]] 이남에는 종적(宗賊)이라는 도적떼가 들끓었고, 토호들은 후한 조정의 지배를 거부하여 제멋대로 할거하고 있었다. 유표는 그 때문에 장강 이남에 있는 본래 형주의 주도(州都)인 한수(漢壽)<ref>[[무릉군]]의 속현.</ref>로 부임하지 않고 의성(宜城)<ref>남군의 속현.</ref>으로 들어가, 남군 지역의 유력 호족인 [[채모]](蔡瑁) · [[괴월]](蒯越) · [[괴량]](蒯良) 등을 직접 방문하여 그들의 조력을 얻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들의 조언에 따라 종적들의 우두머리를 유인하여 살해하고 그 휘하 무리들을 흡수했다. 강하의 도적 장호와 진좌가 양양(襄陽)<ref>[[남군 (중국)|남군]]의 속현이며, 현재 [[호북성]] 양번시 북부에 있었다. </ref>성을 점거하자, 사람을 보내 항복시켜 마침내 강남 일대를 지배하에 두는 데 성공한다. 이후 양양을 주도로 삼고 통치했다.<ref>[[사마표]]: 《전략》 (진수의 삼국지 위서 권6 동2원유전 중 유표전의 배송지 주석에서 재인용)</ref>
 
[[190년]] 각지에서 반동탁연합의 의병이 일어나자 유표도 참가하였다.<ref>《삼국지》 위서 권6 동2원유전 중 동탁전에 따르면, 같은 시기 동탁은 주밀, 오경의 천거를 받아, 각주 자사를 인사 혁신하였다. 그러나 임명된 자들-[[한복 (후한)|한복]](韓馥) · [[유대 (후한)|유대]](劉岱) · [[공주 (후한)|공주]](孔伷) · [[장자 (후한)|장자]](張咨)-은 동탁을 배신하고 반동탁 의병을 일으켰다.</ref> [[192년]] 남양에 웅거한 [[원술]](袁術)이 장사태수(長沙太守) 손견으로 하여금 유표를 공격하게 했다. 이 싸움에서 유표 수하의 강하태수(江夏太守) [[황조]](黃祖)가 패하여 양양성이 직접 포위당하는 지경까지 몰렸으나, 황조의 군사가 쏜 화살에 손견이 죽어 위기를 넘겼다. 그리하여 유표는 마침내 원술의 침략을 저지했다.<ref>[[진수 (서진)|진수]]: 《[[삼국지]]》 권56 손파로토역전 중 손견전</ref><ref name="s6-l">위와 같음, 권6 동2원유전 중 유표전</ref> 《삼국지연의》에서는 유표가 옥새를 얻어 장사로 돌아가는 손견을 [[원소 (후한)|원소]](袁紹)의 명령을 받아 공격하였으며, 이에 분노한 손견이 장사로 귀환하고 형주에 침입하자, 황조에게 명령하여 이를 방어하고, 원소와 동맹하여 대항했다. 황조는 포로로 잡히기까지 하며 고전했지만, 괴량의 계책으로 추격하던 손견을 살해하여 형주를 지킬 수 있었다. 이 때 괴량이 손씨를 완전히 파멸시키도록 권했지만, 이를 거부하고 손견의 유해와 황조를 교환함으로 마무리지었다.
 
[[192년]] [[겨울]]에 조정에 공물을 바쳤고, [[193년]] [[이각 (후한)|이각]](李傕)이 실권을 장악한 조정에서 가절(假節), 진남장군(鎭南將軍), 형주목(荊州牧)으로 승진하고 성무[[제후|후]](成武侯)에 봉해졌다. 이는 유표의 도움을 받고자 하는 속셈이었다.<ref name="s6-l"/><ref name="h74b-l">[[범엽]]: 《[[후한서]]》 권74하 열전제64하 중 유표전</ref> 같은해 원술과 조조가 다투자 원술의 보급로를 끊어 원소와 협조관계에 있던 조조를 지원하였다.<ref>《삼국지》 무제기의 기술.</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