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석 (1595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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맏형 경직(景稷)은 호는 석문으로, 호조판서(戶曹判書)와 도승지(都承旨)를 지냈다. 일찍이 형 석문(石門) [[이경직]](李景稷)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뒤에 청음 [[김상헌]]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13년]] 진사에 급제하였으며 [[1617년]] 증광별시에 급제하였지만 [[인목대비]]의 폐비 상소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삭적당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난 이후 알성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승문원]] 부정자와 [[예문관#조선시대의 예문관|예문관]] 검열, 봉교로 승진하였다. [[1626년]]에 [[이조 (행정기관)|이조]] [[정랑]]에 임명되었으며 바로 [[중직대부]]로 [[이조 (행정기관)|이조]][[좌랑]]에 승진했다가 동년의 [[중시]][[문과]]에 갑과로 합격하여 [[당상관]]으로 승진하였다.
 
[[1632년]]에 [[가선대부]]에 임명되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산림]]의 [[김집 (1574년)|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을 만나 나이를 떠나 고담준론을 펼쳤다. [[인조 반정]] 이후 자신들이 임금을 세웠다는 말을 공공연히 입에 담는 등 공신들의 특권과 전횡을 보고 분개하여, [[김집 (1574년)|김집]], [[송시열]], [[송준길]]의 학문과 덕행을 [[조선 인조|인조]]에게 알려 [[산림]]학자들을 적극 천거하여 등용하게 했다. 같은 [[서인]] 당원이었기에 공신들은 별로 개념하지 않았으나 [[송시열]], [[송준길]] 등은 반정 공신들의 전횡과, 인조의 뜻에 영합하려는 일(정원군의 원종 추숭론 등)에 적극 반대하고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의 복권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반정공신들의 반격과 반발에 대비해 그는 산림 학자들을 적극적으로 후견해주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1636년]]에는 [[대사헌]]과 [[부제학]]을 겸임하면서 [[조선 인조|인조]]를 모시고 [[남한산성]]에 들어갔으며 [[1637년]]에는 예문관 제학을 겸임하면서 [[삼전도비]]의 비문을 썼다. 그 후 [[1638년]]에 [[예문관#조선시대의 예문관|예문관]]·[[홍문관]] 대제학에 올랐으며 [[1639년]]에 [[이조 (행정기관)|이조]] [[판서]]에 올랐다.
 
[[1641년]]에는 [[소현세자]]의 이사(貳師)로 [[청나라]] [[선양 시|심양]]에 갔으며 이듬해인 [[1642년]]에는 청나라 황제의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잠시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그 후 [[1645년]] [[이조 (행정기관)|이조]] [[판서]]가 된다.
그해 4월 이조판서 직에 있었고 9월에 우의정에 오른다. 백헌집에는 이때 그가 이조판서 자격으로 동춘당 송준길과 우암 송시열, 탄옹 권시를 등용했다 한다.<ref name="hanguk01">http://weekly.hankooki.com/lpage/nation/200604/wk2006042010414337070.htm</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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