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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봉사〉에서 송시열의 강조하는 바는 8조와 19조에 집약되어 나타나고 있다. 송시열은 〈기축봉사〉 에서와 마찬가지로 춘추대일통을 강조하면서, 대통이 분명하지 못하면 인도가 어지럽고, 인도가 어지러우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 염려하며, 효종의 재위에 대해 "황천이 전하에게 신성한 왕위를 부여해 주신 이유는 장차 왕리를 잡아 인심을 바루고 왕도를 밝혀 민극(백성의 중도)을 세우며, 사설을 배척하며 사추(선비의 추향)를 통일시키도록 한 것입니다"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공자 · 주자의 공을 이을 것을 주장하였다. 여기에서 드러난 송시열의 강조점은 ‘인심’과 ‘왕도’ 그리고 ‘사추’에 있다. 효종의 재위는 양민하고 왕도정치를 하는 데에 그 의의가 있는 것이며, 선비를 추향함으로써 정통의 설을 바로 세우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송시열이 주자학을 신봉하는 골수 성리학자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고, 효종의 통치는 왕도정치의 틀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곧 사림정치의 도학 실천을 강조하는 것으로, 송시열의 저의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북벌에 있어서도 성리학적 사상의 틀 안에서 관념으로 흐르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 조에서는 “사욕을 극복하여 조정을 바로잡아야 하며, 회복에 뜻을 둔 자는 결코 손바닥을 치고 칼을 어루만지는 것에 뜻을 두지 않는다”고 한 〈기축봉사〉 의 내용을 다시 언급하며 이를 재차 강조하고 있다. 또한 주자의 글속에 요순 · 공맹의 도가 담겨져 있음을 주장하며, “덕업을 높임으로써 황천이 크게 명한 마음과 선왕의 부탁한 뜻에 부응할 것”을 당부하였다. 즉 효종이 유념할 것은 군사력 강화가 아니라 군주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이니, 덕업을 쌓는데 매진하라는 것이다.
[[1658년]] 다시 [[찬선]]에 등용, 이조 참의, [[예조]] [[참판]]에 임명되어 사양하였으나 특지(特旨)를 내리자 소명(召命)하여 상경하였다. 효종의 간곡한 부탁에 따라 이해 7월 6년 만에 다시 찬선에 임명되어 벼슬길에 나왔고, 9월에 특명으로 차헌대부 [[이조 (행정기관)|이조]][[판서]]로 승진, [[10월]]에 [[조선 효종|효종]]이 특별 선물로 그에게 초피(貂皮) 모자를 주었다. 그는 황송한 것이라며 차자를 올려 사양하였으나, 효종은 당상관에게 초피모자를 주는 전례를 들어 윤허하지 않았다. 이후 1659년에 효종이 갑자기 승하할 때까지 절대적인 신임 속에 북벌계획을 추진하는 핵심적인 인물로 부상하였다.
 
===== 황산서원과 동학사 모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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